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94 고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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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천안

94. 고선양* (1803~1867)

 

고선양은 충청도 신창 창말(현 충남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에서 누대로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어느 정도 학문을 배운 데다가 도리에도 밝아 마을 이장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는 어릴 때 이미 천주 교리를 배웠으나, 가족의 반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중년에 이르러 부모를 설득하여 온 가족이 함께 영세 입교한 뒤로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손수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고선양의 서모(庶母) 백 프로타시아는 먼저 천안 포교에게 잡혀 공주로 압송되었고, 이어 고선양의 맏며느리와 셋째 며느리도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으며, 고선양의 아내와 막내 아들도 경포, 곧 서울의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고선양의 아내와 막내 아들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고선양은 남은 가족들과 함께 잠시 피했으나, 그가 배포한 서적 때문에 밀고를 당해 장남과 차남과 함께 공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된 고선양과 두 아들은 영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먼저 체포된 서모 백 프로타시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프로타시아는 고선양 삼부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렇게 체포되어 왔으니,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여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하자.”고 권면하였다.

이후 고선양은 서모 프로타시오와 두 아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7년으로, 고선양의 나이는 64세이고, 서모 프로타시아의 나이는 74세, 장남의 나이는 24세, 차남의 나이는 21세였다. 이를 전후로 하여 고선양의 세 며느리도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시복추진대상자 선정위원회는 고선양 가족 순교자 7위를 대표하여 고선양을 시복 대상자로 선정하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