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1 장사광 베드로
  1. 장사광 베드로 (1787∼1839)

 

장사광 베드로는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양근 한감개(大甘浦, 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살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만나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에서 10리 떨어진 곳으로 한감개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자리를 잡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열심이 식어 1828년까지 교회를 멀리 하게 되었다.

베드로가 회두한 것은 아내 손(孫) 막달레나의 기도와 은총의 격려, 그리고 신자들의 권면 덕택이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그의 아내 막달레나는 1802년 서울에서 순교한 복자 손경윤(孫景允) 제르바시오 회장의 딸이었다.

회두를 결심한 베드로는 비신자였던 부모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위패(位牌)를 불살랐으며, 유교의 제사 행위를 강요하는 향교(鄕校)의 명단에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삭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충실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으며, 술을 완전히 끊고 절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자 베드로는 곧 성사를 받았고, 이후 그의 신앙심은 더욱 굳어져 신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지켰다.

1839년 8월 장사광 베드로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 군수 앞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군수가 그들 부부에게 여러 차례 형벌을 가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베드로는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 막달레나는 잠시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였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군수는 부부가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은총의 힘을 얻어 신앙을 굳게 다짐하면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 아이들의 괴로움은 내 자신의 괴로움보다 백배나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천만 번 못하겠습니다.”

 

얼마 후 군수는 사건의 전말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다시 한 번 베드로 부부를 시험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그 결과 베드로 부부는 열 번 이상이나 문초와 형벌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두 아들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아들들이 석방된 뒤 옥에 남은 베드로 부부는 관장의 지시로 일체의 음식을 제공받지 못해 극한의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베드로 부부는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마다 배교를 거절하였고, 그러던 중 장사광 베드로는 1839년 12월 18일(음력 11월 13일)에 52세의 나이로, 그의 아내 손 막달레나는 12월 22일(음력 11월 17일)에 55세의 나이로 각각 순교하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