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4 손경서 안드레아
  1. 손경서 안드레아 (1799∼1839)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의 본관은 밀양이요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규’(景奎)로, 충청도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서 손후대(孫厚大)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안드레아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66년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孫子善, 토마스) 성인은 그의 당질이고, 1868년 서울에서 순교한 손자중(孫子仲, 바오로)은 그의 아들이며, 손여회(孫如會, 필립보)와 손여일(孫汝一, 필립보)은 그의 손자이다. 이 밖에도 그의 집안에서는 1866년 이후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부요한 집안에서 태어난 안드레아는 성품이 너그러운 데다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식사를 손수 장만하여 부모님께 드리곤 하였다. 혼인한 뒤에는 한 번도 아내와 다툰 일이 없을 정도로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으며, 자녀와 하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사업에 능숙하였던 그는 친척과 친구 일까지도 보살펴 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 상황 때문에 온전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안드레아는 교회의 본분을 깨닫고 가족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 일을 돕거나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청주 출신 송구현(宋龜賢, 도미니코)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것도 이때였다. 또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그를 도와 교회에 봉사했으며, 프랑스 선교사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를 모셔다 가족들과 함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38년에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겉으로 배교하고 속량금을 낸 뒤 석방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1839년의 기해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보속하기 위해 앵베르(L. Imbert, 范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하여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손경서 안드레아는 처남 정화경(안드레아)과 함께 수원 상귀(일명 상구, 상게)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곧바로 앵베르 주교를 서울에서 모셔와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 다음 주교의 명에 따라 모방 신부와 샤스탕(J. Chastan, 丁 야고보)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신부들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는데, 앵베르 주교는 안드레아가 집을 떠난 뒤인 8월 초에 밀고자의 책략으로 포교에게 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손경서 안드레아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포교들은 남은 가족들에게 책임을 씌워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고문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여 포교들에게 자수하였다.

  안드레아는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에게 가해진 형벌을 얼마나 혹독했던지 그는 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또 삶에 대한 약간의 애착 때문에 배교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이전의 배교를 취소하였다. 그런 다음 1839년 12월 26일(음력 11월 21일)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