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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청 명동대성당1.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1906-1950?)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음력 1906년 8월 24일(양력 1906년 10월 11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의 감육리 살구재(杏山, 현 화진리)에 있는 천주교 신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읜 탓에 고향 인근의 감칠리에 살던 누나 마리아의 집에서 성장했고,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면서 인정과 참을성도 많았던 그는 옷을 챙겨 입지 못해 온몸이 얼어드는 상황에서도 이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책을 좋아했으며, 무슨 일이든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하는 성격이었다.
1933년 5월 25일, 평양 관후리 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사제품을 받은 홍용호 프란치스코 신부는 이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이어 1934년 1월에 창간된『가톨릭 연구 강좌』(『가톨릭 조선』의 전신)의 편집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36년 3월부터는 평양지목구장 비서, 영유 본당과 순천 본당 주임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일제 당국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다음 해 2월에 석방되었다. 그런 다음 평양대목구장 서리 노기남(바오로) 신부의 직무 대행 겸 관후리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3월 9일,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신부는 제6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3월 21일 관후리 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당시 그가 정한 사목 표어는 "일어나 가자."(Surgite Eamus, 마태 26,46)였다. 이어 그는 이듬해 4월 17일에 주교(Auzia 명의 주교)로 임명되어 6월 29일 평양 산정현(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의 임시 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일찍이 『가톨릭 연구 강좌』를 통해 복음 선포와 문맹 퇴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성소 계발을 중시하였으며, 주일 학교 교육과 순교 신심 함양과 선교 활동에 힘썼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 수립된 공산 정권으로부터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를 환수하여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1947년 9월 1일에 거행된 대성당 정초식 때 그는 ‘향후 완공될 대성당을 평화의 모후이신 성 마리아께 봉헌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은 더욱 가중되었고,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이로 말미암아 교회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1948년 12월에는 헝가리의 민센티 추기경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최악의 사태가 멀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순교를 각오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듬해 5월 9일에는 북한 공산 정권이 함흥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신 보니파시오) 주교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연행하자 당국에 직접 항의문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을 불법 체포하고, 교회를 폐쇄한 것은 명백한 종교 박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며칠이 지난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서 첫 종신 서원 예정자와 만나고 있던 때였다. 북한 노동당 내무상의 면담 통보가 관후리 주교좌성당을 거쳐 기림리(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주교관에 전달되었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서포로 찾아온 김운삼 요셉과 송은철 파트리치오를 통하여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주교는 김운삼과 송은철을 먼저 보낸 뒤 곧 수녀원을 떠나 평양 시내로 출발하였다. 그것이 당시에 확인된 홍용호 주교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부감목(곧 총대리)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와 비서 최항준 마티아 신부는 주교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 뒤 김필현 신부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서포 수녀원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오다가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체포되었고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曺晩植) 등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는데, 북한군은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급히 퇴각하면서 수감자들을 모두 총살하였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도 이때 그들과 함께 처형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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