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9 존 오브라이언

19. 존 오브라이언 신부(1918-1950)

 

존 오브라이언(John Patrick O' Brien, 오 요한) 신부는 1918년 12월 1일 아일랜드 로스커먼(Roscommon)주의 도나몬(Donamon)에서 토머스 오브라이언(Thomas J. O’Brien)과 메리 오브라이언(Mary O’Brien)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남동생 빈센트 오브라이언(Vincent O’Brien)은 뒷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필리핀 선교사가 되었고, 여동생은 애덕 수녀회(Sister of Charity)에 입회하였다.

존 오브라이언 신부는 일찍이 로스커먼(Roscommon)주의 세인트 네티 대학(St. Nathy’s College)에서 수학하였고, 열여덟 살이 되던 1936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여 1942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선교지로 떠나지 못하고 영국군의 군종 사제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존 오브라이언 신부는 1948년 1월 14일 한국에 입국하였고, 1950년 목포 본당(현 산정동 본당)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북한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존 오브라이언 신부는 본당 주임인 토머스 쿠삭(T. Cusack, 고 토마스) 신부와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 본당에서 사목을 돕던 한 마리아 수녀는 오브라이언 신부와 주고받던 대화 내용을 뒷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존 오브라이언) 신부가 묵묵히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치명(致命)하겠느냐?’고 묻기에 생각도 없이 ‘용감히 치명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치명할 결심이면 온금동 냉담자 집에 가서 성사 보도록 통지하라.’고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신부는 이미 사태를 알고 영혼 하나라도 더 구하고 싶은 거룩한 마음뿐이었다. …… 신부는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치명에 대해 세밀히 설명하고, ‘인민군들이 아무리 부정한 일을 강요해도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죄가 안 되니 안심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치명하라’고 ……. ”

 

북한군들이 목포에 진입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7월 24일 무렵이었다. 이어 7월 25일에는 북한군들이 목포 성당으로 들이닥쳐 존 오브라이언 신부와 토머스 쿠삭 주임 신부를 불러낸 뒤 목포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하였다. 또 7월 30일 주일에는 다시 성당에 와서 토머스 쿠삭 신부에게 신자 명단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북한군들은 존 오브라이언 신부와 토머스 쿠삭 신부 그리고 광주지목구장 패트릭 브레넌(P. Brennan, 안 파트리치오) 몬시뇰을 함께 연행해서 목포 경찰서에 감금하였다가 광주 교도소로 이송하였다.

8월 26일에는 미군 마카루미(A.Y. Makaroumis) 중위가 다른 군인 두 명과 함께 교도소로 끌려와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뒷날 그의 증언에 따르면 “존 오브라이언 신부 등 선교사들은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였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석 장의 담요조차 다른 수감자들에게 양보했다.”라고 한다.

얼마 뒤 북한군들은 존 오브라이언 신부와 함께 수감되어 있던 서른두 명을 끌어낸 뒤 밤을 이용하여 서울 방향으로 이송하였다. 그러다가 대전 부근에 이르러 트럭이 고장 나자, 일행들을 모두 도보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전에 도착한 뒤에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은 임시 수용소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감금하고, 미군들은 대전 형무소로 이송하여 수감하였다. 존 오브라이언 신부 일행은 그곳에서 강만수(요셉)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들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과 형무소에 수감되된 사람들을 모두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처형하였다. 이때 존 오브라이언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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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