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패트릭 번 주교(1888-1950)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方溢恩 파트리치오) 주교는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에서 패트릭 번(Patrick Byrne)과 안나 실즈 번(Anna Seales Byrne)의 10남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스물한 살 때인 1909년 9월에 그는 볼티모어 성 마리아 신학교(St. Mary’s Seminary & University)에 입학하였고, 1915년 6월 23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7일 만인 6월 30일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패트릭 번 신부는 그 뒤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총장 비서 겸 참사 위원을 거쳐 1918년 6월부터 4년 동안 소신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 11월 27일 교황청에서 한국 평안도 지역의 선교를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면서 그 초대 한국 지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5월 10일 한국에 입국한 뒤 사제와 수도자들의 한국 파견, 평안도 지역의 교세 신장 등에 힘썼다.
1927년 3월 17일에는 평양지목구가 설립되고, 그해 11월 9일 패트릭 번 신부는 그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되면서 몬시뇰이 되었다. 그 뒤 그는 평양 외곽 지역인 대동군 임원면의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새 부지를 매입한 뒤 지목구 청사와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29년 메리놀 외방 전교회 본부에서 개최된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8월 12일에 제1 참사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평양지목구장을 사임하게 되었다.
패트릭 번 몬시뇰은 1932년부터 메리놀 신학교의 학장을 겸임하였다. 당시에 그는 ‘하느님의 뜻이 일상의 사건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그는 기도 생활에 충실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수행할 때마다 언제나 용기와 겸손, 인내로 남다른 귀감이 되어 주었다. 이어 그는 1934년 7월 12일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일본 선교 책임자에, 1937년 3월 19일에는 초대 교토지목구장에 임명되어 1939년까지 재임하였다.
1947년 7월 17일 패트릭 번 몬시뇰은 초대 한국 교황청 순시자(Apostolic Visitor)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 뒤 그는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하고, 유엔 총회에서 이를 승인받을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또 1949년 4월 5일에 개최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전국 협의체를 출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1949년 4월 7일 패트릭 번 몬시뇰은 초대 주한 교황 사절과 주교로 임명되어 6월 14일 명동 대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다. 이때 그가 정한 주교 표어는 “주님이 아니하시면”(Nisi Dominus, 시편 127)이었다.
그러나 패트릭 번 주교의 활동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직후 미국 정부가 자국민들을 모두 일본으로 대피시키면서 패트릭 번 주교에게도 피신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한국 신자들과 함께 남겠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패트릭 번 주교는 교황 사절관에 머물다가 6월 29일 명동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7월 11일에 체포되어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는데, 북한 노동당 재판관이 “유엔과 미국, 바티칸을 탄핵하는 설교를 하라. 아니면 사형이다.”라고 하자, 패트릭 번 주교는 “내가 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소. 죽기를 택하겠소.”라고 답하였다.
패트릭 번 주교는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1950년 7월 19일에 평양으로 이송되어 투옥되었다가 9월 5일 평양 수용소를 떠나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만포에서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다시 하창리(현 중강군 상장리)로 이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면서 극심한 고통과 질병을 기도와 신앙으로 이겨 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창리에 도착한 지 8일 만인 11월 25일에 선종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동료들은 패트릭 번 주교의 시신을 수용소 인근에 안장하였다.
죽음을 앞둔 어느 날, 패트릭 번 주교는 자신을 돌봐 주던 춘천지목구장 토마스 퀸란(T. Quinlan, 구 토마스) 몬시뇰과 비서 윌리엄 부드(W. R. Booth, 부 굴리엘모) 신부에게 각각 다음과 같이 말을 남겼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 몸조심하시고, 이제 다른 이들을 돌보세요."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생애의 가장 큰 은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고난을 겪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