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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당
21.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1909-1950)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는 1909년 7월 25일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냉골(현 판교군 지상리)에서 이만현(가브리엘)과 김 수산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서당에 다녔고, 열네 살이 되던 1923년 9월 18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서당에 다닐 때는 아주 성실하고 용모 단정한 학생이었으며, 신학생 시절에도 열심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1936년 3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4월 9일 강원도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는 희생과 열정으로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힘썼고, 애덕과 봉사 정신으로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하였다. 매주 목요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성시간을 가졌으며,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자주 권유하였다. 신자들은 이러한 그를 ‘성인 신부’라고 부르면서 존경하고 따랐다. 1937년 9월 28일에 그는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수도명: 안토니오)하였다.
1939년 6월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강원도 양양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본당과 신자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공소 순방과 신자 돌봄, 선교 활동에 힘썼으며, 양양의 중심지인 성내리에 성당을 신축하여 1940년 2월에 봉헌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신자들과 만나 즐겁게 이야기하였고, 그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으며, 스스로 성체 조배와 묵상과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말에는 종교 활동에 대한 당국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양양 본당도 그들의 탄압과 감시를 받아야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피해 남하하는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은 증가하였고,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도 어느 날 공산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우들이 있는 한 양양을 떠날 수 없으며, 사제로서 양양에 있는 교우들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은 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이므로 남게 해 달라.’고 말한 뒤 성당을 지켰다. 그러다가 성당을 빼앗기자, 이광재 신부는 성당 안의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 두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나중에는 성당 아래의 부속 건물이나 남문리의 한 가옥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몇몇 신자들의 도움을 얻어 월남하는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을 비밀리에 숨겨 주거나 변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들이 삼팔선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의 도움으로 월남할 수 있었던 임 그레고리아 수녀는 뒷날 그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이광재 신부님의 원의는 ‘나보다 더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나라도 더 월남하여 남한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힘껏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평강 본당에 있던 백응만(다마소) 신부가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으로 가서 교우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평강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신자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이 월남을 권하면, 이광재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교우들이 (월남을) 원하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교우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앞장선다면 그들을 몰고 뒤따르겠습니다. 목자는 양을 버릴 수 없습니다.”
1950년 4월,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잠시 양양으로 돌아온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두 달 뒤 강원도 이천 등지에서 사목하던 김봉식(마오로) 신부가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런 다음 원산과 평강 지역을 오가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비밀 미사를 집전하다가 1950년 6월 24일 평강에서 북한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곧 원산으로 끌려가 와우동 교화소(현 원산시 와우동)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김봉식 마오로 신부를 만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그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10월 8일 늦은 밤,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교화소 뒤의 방공호로 끌려 갔고, 그 안에서 벌어진 학살 때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의 나이는 41세였다. 이때 총상을 입었던 그는 어떤 사람이 “물, 물, 아이고 목말라!” 하고 도움을 청하자,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라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을 도우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