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1900-1950)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는 1900년 1월 30일 서울에서 서 바오로와 박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4월 22일에는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의 주임인 푸아넬(V. L. Poisnel, 박도행 빅토르)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911년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6월 6일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황해도 장연(長淵)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었다가 1927년 3월 충북 장호원 본당(현 감곡 본당)의 보좌로 전임되었고, 1928년 5월에는 황해도 해주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29년 5월 서울 백동 본당(현 혜화동 본당)의 주임으로 전임된 그는 옛 포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부속 건물들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1929년 9월 8일 봉헌식을 가졌다. 서기창 신부는 전례와 일상생활에 대단히 엄격하였고, 교리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양주의 덕정리 공소(현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과로 때문에 주마창(走馬瘡)에 걸렸고, 결국에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36년 5월 10일 영등포 본당(현 도림동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던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1년 6월부터 주마창으로 말마암은 건강 때문에 잠시 휴양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 5월 하순 평양 서포 본당(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의 주임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담임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10월 말에는 황해도 송화 본당(현 황해남도 송화군 송화읍)의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월남하는 교우들 편으로 본당 소식을 서울에 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공산 당국으로부터 감시를 받았으며, 8월 31일 성당과 사제관이 징발되면서 추방되어 송화면 홍암리 쇠골[金洞]에 있는 교우 임능익 베드로의 과수원 별채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홀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독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1950년 10월 6일 오후 두 시경, 유엔군의 북진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던 때였다. 식복사 박순이(朴順伊) 아가타가 노역에 동원되어 나간 사이에 젊은 정치 보위부원들이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를 찾아와 ‘종교인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구실로 연행하였다. 노역에서 돌아온 아가타가 이웃 할머니에게서 신부의 연행 소식을 듣고는 본당의 김 회장과 함께 정치 보위부 등지로 다니면서 서기창 신부의 행방을 알아보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가운데 10월 16일 유엔군이 송화에 들어왔다. 10월 19일에 한 청년이 찾아와서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로 생각되는 사람의 시신을 송화 정치 보위부에서 본 것 같다고 전해 주었다. 이에 아가타는 이승계 시메온, 김달삼 시메온, 김달권 토비아 등과 함께 송화 정치 보위부로 갔고, 그곳 방공호 안에서 서기창 신부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 당시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는, 안경은 없어지고 구두 한 짝과 아가타가 꿰매 준 양말을 신은 채 서기창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 양복 안에는 서기창 신부의 성모 패와 돈 보스코 패 그리고 회중시계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신부의 시신은, 머리에는 대못이 박혀 있었고 몸은 철사로 포박된 채 입은 걸레로 틀어 막힌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교우들은 이튿날인 10월 20일 사제관 마루 판자를 뜯어서 관을 만든 뒤 서기창 프란치스코 신부의 시신을 쇠골 뒷동산에 안장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