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1921-1950)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신부는 1921년 10월 3일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 홍문리(현 은율읍)에서 전인택(全仁澤) 크리소스토모와 유(柳) 갈라의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전주)이다. 그는 은율보통학교에 다니던 1932년 3월 26일 은율 본당의 6대 주임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8대 주임 윤의병 바오로 신부의 추천으로 1935년 3월 서울 혜화동의 소신학교 즉 동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 소신학교를 졸업한 전덕표 안드레아는 대신학교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로 진학했으나, 1942년 2월 학교가 폐쇄되면서 함경도의 덕원 신학교로 편입해서 학업을 계속해야만 하였다. 신학생 시절에는 학생 성가대원으로 활동하였고,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가 학생들에게 교리와 성가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스승 신부들은 성격이 듬직한 그에게 전례 담당이나 병자 간호 같은 일들을 맡기곤 하였다. 이후 그는 1946년 5월에 월남해서 서울의 경성천주공교신학교로 편입했으며, 1946년 11월 21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는 황해도 사리원 본당 박우철 바오로 신부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1946년 12월 20일 박우철 주임 신부와 함께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사리원 본당에 도착한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는 연로한 박우철 신부를 도와 열심히 사목하였고, 소화 데레사회, 예수성심 청년회 등 여러 평신도 단체를 설립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었다. 청소년들에게 순교 정신을 심어주려는 목적에서 79위 복자반 학생회도 설립했으며, 그들에게 성경과 순교 사화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노동당의 종교 말살 정책은 더욱 심해졌다. 유물론 교육이 점차 강화되었고, 신자 학생들로 하여금 일요일에도 등교하도록 함으로써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 와중에도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는 틈틈이 사회주의의 모순점을 청소년들에게 설명해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1949년 5월 이후에는 공석이 된 신천과 해주 성당을 비밀리에 오가면서 신자들을 보살펴 주었다. 당시 사리원 성당은 월남하는 신자들의 피신처가 되곤 했는데,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는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는 이유에서 해주로 끌려가 일주일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한 끝에 석방된 일도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는 피신하지 않고 본당 신자들과 사리원 성당을 찾아오는 여러 교우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주임 박우철 신부와 함께 사리원 시내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동아포로 피신하여 볏가리 속에서 숨어 지냈다. 이때에도 전덕표 신부는 매일같이 동이 트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사리원 성당으로 가서 새벽미사를 집전한 뒤 동아포로 돌아오곤 하였다.
10월 12일 아침이었다. 박우철 신부와 동아포 신자들은 유엔군이 들어올 때까지는 더 이상 성당에 가지 말라고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전덕표 신부는 다시 사리원 성당으로 향하였다. 성체를 거두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두 거두어 다시 동아포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때 마침 한 목사가 찾아와 ‘기독교 연맹 회의가 있으니 가자’고 하면서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를 데려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한 청년 예비 신자에게는 “꼭 영세하여 천주님의 아들이 되라.”는 부탁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10월 17일, 유엔군이 사리원에 입성하자마자 본당 신자들은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의 행방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0월 19일, 사리원 정치보위부의 방공호 속에 쌓인 시신들 맨 아래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목과 양손은 전깃줄로 한데 묶여 있었고, 몸은 활처럼 굽어있었으며, 혀는 입 밖으로 빠져나와 굳어 있는 채였고, 입에는 솜이 가득 들어 있었다. 게다가 손가락은 전기 고문을 받은 탓인지 새까맣게 탄 채 비틀려 있었으며, 눈 주위에는 예리한 물체로 찔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본당 신자들은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사리원 성당으로 옮긴 뒤, 옷장을 뜯은 목재로 관을 만들어 그 안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박우철 신부의 주례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그 시신을 성당 앞 상묏산에 안장했으니, 당시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의 나이 3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