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장소
묵호성당, 죽림동성당
29.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1915-1950)
프랜시스 캐너밴(Francis Canavan,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15년 2월 15일 아일랜드 골웨이(Galway)의 헤드포드(Headford)에서 요셉 캐너밴(Joseph Canavan)과 엘리사벳 캐너밴(Elizabeth Canavan)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한 뒤 골웨이의 세인트 메리 대학(St. Mary’s College)을 졸업한 그는 1940년 12월 21일 달간 파크(Dalgan Park), 곧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서 사제품을 받고, 극동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출발하지 못하고 골웨이 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948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949년 1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는 춘천의 죽림동 성당에서 춘천지목구장 토마스 퀸란(T. F. Quinlan, 구인란 토마스) 몬시뇰의 보좌로 사목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부터 춘천에서는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퀸란 몬시뇰과 캐너밴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켰다. 미국의 군사 고문관 한 사람이 원주로 피신하면서 그들을 찾아와 피신을 권유하자, 퀸란 몬시뇰은 교우들과 함께 남겠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캐너밴 신부도 춘천을 떠나는 것을 거부하고 지목구장과 함께 남았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7월 2일이었다.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가 죽림동 성당에서 퀸란 몬시뇰을 보좌하여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군들이 성당 안으로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그들을 체포하여 내무서로 끌고 갔다가 춘천 감옥에 투옥하였다. 며칠 뒤 홍천에서 체포된 크로스비(P. J. Crosbie, 조선희 필립보) 신부도 이곳으로 끌려왔고, 이들 세 명은 7월 16일 서울로 압송되어 이튿날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7월 19일에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는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어 투옥되었다가 9월 5일에는 평양 수용소를 떠나 9월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만포에서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으로, 다시 하창리(현 중강군 상장리)로 이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공포와 고통, 이별의 아픔 등을 겪으면서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행진 도중에 얻은 폐렴으로 하창리에 도착한 뒤에도 계속 고통을 겪다가 1950년 12월 6일에 선종하고 말았다. 당시 캐너밴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선종 직전에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는 자신을 위로하는 동료에게 “나는 성탄절 만찬을 천국에서 먹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토마스 퀸란 몬시뇰과 동료들은 그의 시신을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교황 사절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방 파트리치오) 주교 옆에 안장하였다.
* 굵은색 표시: 출간 이후 추가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