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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리성당, 당진성당
31. 조제프 뷜토 신부(1901-1951)
조제프 뷜토(Joseph Constant Baptiste Bulteau, 吳弼道 요셉) 신부는 프랑스 뤼송(Luçon)교구 레 브루질(Les Brouzils)에서 조제프 뷜토와 마리 뷜토의 아들로 1901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는 1915년 이후 뤼송교구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어 대신학교를 마치고, 1924년 9월 12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927년 6월 29일에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대구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 동생 아녜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선교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선교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것이고,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모든 이에게 나를 내어 주는 것이다.”
1927년 9월 18일 파리를 떠난 조제프 뷜토 신부는 11월 11일 한국에 입국한 뒤 대구 주교관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그런 다음 1928년 4월 28일 부산진 본당(현 범일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그곳에 부임한 뒤 성당을 개축하였다. 조제프 뷜토 신부는 청소년 강습소인 소화 학원을 설립하는 등 사목에 힘썼으며, 1932년에는 일본으로 이주한 본당 신자들을 방문하려고 일본에도 다녀왔다. 1938년 4월 말 그는 프랑스로 휴가를 떠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징집되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1941년에 석방된 뒤 뤼송교구에서 사목하였다.
조제프 뷜토 신부는 1950년 3월 12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3월 25일에 대전지목구의 공세리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 6일에는 북한군이 공세리에서 가까운 평택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신자들은 7월 7일 아침 미사가 끝난 뒤 조제프 뷜토 신부를 만나 “신부님, 피난 가셔야죠?” 하고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뷜토 신부는 “네, 가야지요. 하지만 신자들이 안 가면 나도 못 가요. 목자가 양을 두고 갈 수 없지요.” 하며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7월 8일 아침, 공세리 성당으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곧바로 조제프 뷜토 신부를 체포하였다. 사제관에서 라디오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간첩 누명을 씌우고, 7월 17일에는 얼마 전 성당 인근에 추락하였다가 체포된 미군 포로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하였다. 조제프 뷜토 신부는 서울에 도착한 지 사흘 뒤인 7월 21일,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폴 비예모(P. Villemot, 우 바오로) 신부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베아트릭스(Béatrix de Marie) 관구장 수녀 등을 만났다.
7월 26일에 조제프 뷜토 신부는 폴 비예모 신부 등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어 29일에 도착하였고, 9월 5일에는 다시 평양 수용소를 떠나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그 뒤에도 그들은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만포로 돌아왔다. 당시 조제프 뷜토 신부는 『성무일도』서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는 수감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회 서적이었다.
조제프 뷜토 신부와 동료들은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만포에서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으로, 다시 하창리(현 중강군 상장리)로 이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뷜토 신부는 연로한 비예모 신부를 부축하고 걸어야 하였지만 이 어려움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줄곧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조제프 카다르(J. F. Cadars, 강달순 요셉) 신부를 꾸준히 돌봐 준 사람도 뷜토 신부였다.
그동안 조제프 뷜토 신부도 점점 쇠약해져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1951년 1월 5일, 그는 동료 셀레스탱 코요스(C. Coyos, 구인덕 첼레스티노)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았고, 이튿날 아침에 조용히 선종하였다. 당시 조제프 뷜토 신부의 나이는 50세였다. 그의 시신은 미군 포로들이 수용소 인근에 안장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으제니(Eugénie du S.C. Demeusy) 수녀는 뒷날 그의 동생 아녜스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매일 지치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고, 감탄할 만큼 헌신적이고 양처럼 온순했으며, 모든 시련을 감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