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선영 요셉 신부(1898-1974)
김선영(金善永) 요셉 신부는 1898년 9월 30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청계리(현 의왕시 청계동)에서 김석오(金錫午) 세자 요한과 이치도(李致道)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조부 김준원(金俊遠) 아니체도는 1866년 병인박해(또는 1846년 병오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김선영 요셉은 열 살 때인 1908년 9월 26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 5월 20일 사제품을 받았다. 이에 앞서 그의 부친은 1917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동작리(현 동작동)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는 신학교 별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로써 김선영 요셉 신부는 약현 본당 출신의 사제가 되었다.
서품 직후 김선영 요셉 신부는 모교인 예수 성심 신학교 소신학교의 라틴어 교사로 임명되었고, 1928년 9월에는 황해도 장연 본당(현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보좌로 임명되었다가 건강 때문에 1931년 8월부터 오랫동안 본가에서 휴양하였다. 그 뒤 건강을 회복한 김선영 신부는 1935년경 중국 만주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1936년 4월에는 길림대목구 해북진(海北鎭) 선목촌(善牧村, 현 흑룡강성 수화시 부근)의 담임 신부로 임명되어 한국인 신자들의 사목을 맡았다.
1937년 7월, 김선영 요셉 신부는 만주 신경 본당(新京本堂, 현 길림성 장춘시)으로 전임되는 동시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길림대목구장 가스페(A. Gaspais, 高德惠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이어 1946년 5월(또는 1945년 9월)에는 하얼빈(哈爾賓) 도외(道外)의 부가전(傅家甸) 성당의 담임으로 임명되어 선목 병원(善牧病院) 관리를 겸직하였다. 김선영 신부는 신자들에게 레지오 마리애 단체 활동을 장려하고, 공산당원들의 회두와 세계 평화를 위한 묵주 기도의 봉헌을 강조하였다.
1949년 10월 이후 중국 공산당이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김선영 요셉 신부는 길림교구 대리 주교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김선영 신부는 세영(世永)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다가 1951년 10월 9일 중국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반혁명 분자라는 죄명 아래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천주교 애국회의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51년 10월 이후 김선영 요셉 신부는 흑룡강성의 염가강(閻家崗, 현 하얼빈시 도리구), 평산(平山), 옥천(玉泉, 현 해륜시 옥천촌), 북안(北安, 현 흑하시 북안시) 감옥 등지로 이송되면서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도 김선영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기보다는 함께 체포되어 수감된 임복만(任福萬) 바오로 신부와 양세환(梁世煥) 비오 신부를 더 걱정해 주었다. 김선영 요셉 신부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1956년에 석방된 어느 개신교 목사는 이렇게 전해 주었다.
“노령의 조선인 신부가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힘이 없어 쓰러지면 발길로 채이고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항상 평온한 얼굴로 잘 견뎌 내고 있다. 수형 생활 중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66년에 김선영 요셉 신부의 형기는 만료되었다. 그러나 중국 당국에서는 그에게 직계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석방해 주지 않았고, 1967년에는 인룡하(引龍河) 농장(현 흑룡강성 흑하시 오대련지시 룡진)의 한 강제 노동 수용소로 이송하였다. 그 뒤 김선영 신부는 강제 노역과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에 걸리고, 혹독한 추위로 결핵과 천식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마침내 선종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때가 1974년 2월 12일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1987년 3월 21일 한국 천주교회는 김선영 요셉 신부 생전에 그와 연락을 취하였던 최경숙 루치아 수녀의 도움으로 인룡하 농장의 무덤에서 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5월 6일 국내로 운구하였고, 11일 장례 미사를 봉헌한 뒤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