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마리 메히틸드 수녀(1889-1950)
성체의 마리 메히틸드(Marie Mechtilde du St. Screment) 수녀의 속명은 고들리브 데브리스(Godelieve Devriese)로, 고들리브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1889년 2월 12일 벨기에령 플랑드르(Flanders)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직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언니들을 도와 부인복을 만들었다.
고들리브는 나이가 들면서 차츰 사랑의 생활과 영적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고, 본당 주임 신부의 소개로 1906년 11월 21일 이프르(Ypres 또는 Ieper)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런 다음 ‘성체의 마리 메히틸드’를 수도명으로 받고, 1907년 12월 13일에 착복식을 하였으며, 1908년 12월 14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메히틸드 수녀는 바른 판단력과 훌륭한 수도 정신, 섬세한 애덕과 봉사 정신을 지녔다. 그녀의 밝고 성실하고 초자연적인 모습은 하느님과의 일치된 모습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프르 가르멜 수도원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이에 메히틸드 수녀는 1917년 9월 프랑스의 에르쉬르라두르(Aire-sur-l'Adour)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갔다가 2년 뒤, 수도자가 부족한 터키의 스미르나(현재의 İzmir) 가르멜 수녀회에 자원하였다. 그러나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으로 수녀원이 폐쇄되면서 에르쉬르라두르 수녀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930년에 그녀는 부원장으로 선임되었고, 6년 뒤에는 원장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가르멜회의 수녀들이 파견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국 수도원에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39년 3월 말, 마침 그녀의 원장 임기가 끝났다. 교황청 수도자 성성은 두 명의 수녀가 먼저 한국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권고하였다.
1939년 4월 10일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마리 마들렌(M. Madeleine) 수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났다. 그들은 5월 24일 한국에 도착한 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1940년 3월 25일 서울 혜화동의 작은 집으로 옮겨 한국 가르멜 수녀회를 설립하고, 4월 2일 성모 영보 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초대 원장이 되어 새 수녀원 건축을 시작하였고, 1941년 7월 16일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이를 봉헌하였다.
1949년 10월 17일 마리 메히틸드 수녀가 원장직에서 물러나고, 아기 예수의 테레즈(Thérèse) 수녀가 새 원장이 되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군의 침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던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이프르와 스미르나에서 두 번이나 거듭 절박한 위험에서 나를 건져 주셨지요. 나로서는 세 번째 피난을 하게 될 것인데, 이번엔 그냥 그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1950년 7월 15일,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테레즈 원장 수녀 등과 함께 지도 사제인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 공 안토니오) 신부 등 세 명의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런 다음 오후에 다른 수녀들과 함께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삼화 빌딩에 갇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재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서 7월 19일에는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9월 5일에는 평양 수용소를 떠나 9월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 일행은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10월 31일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야말로 ‘죽음의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폐렴까지 겹쳐 육신이 한계에 달하였지만, 북한군은 막무가내로 몰아쳤다. 테레즈 수녀는 힘든 상황에서도 메히틸드 수녀를 꾸준히 보살펴 주었다.
11월 4일 중강진에 도착해서 끝날 것 같았던 여정은 16일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하창리(현 중강군 상장리)가 목적지였다. 마리 메히틸드 수녀와 앞을 보지 못하는 마리 마들렌 수녀만은 이튿날 소달구지를 타고 출발하였다. 감시병들은 그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달구지에 잡아매었다. 그렇게 하창리에 도착하였을 때 메히틸드 수녀는 이미 임종이 시작되어 혼수상태에 빠졌고, 동료들의 기도 안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11월 18일 밤으로, 그녀의 나이는 61세였다.
중강진에서 출발하기 전날 마리 메히틸드 수녀는 마들렌 수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과실이 있습니다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자비가 무한하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하창리 수용소 인근에 가매장 상태로 안장되었다. 동료 수녀들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작은 흰 묵주를 걸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