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전기수 그레고리오(1922-1950)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는 1922년 12월 29일 전남 나주군 나신면 보산리(현 나주시 보산동) 185번지에서 전태선(全泰先)과 최용문(崔用文) 엘리사벳의 아들로 태어났고, 1936년 4월 11일 나주 성당에서 헨리(H. Henry, 현 하롤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조카 전영 안토니오는 현재 광주대교구 사제이다.
1945년 서울 천주 공교 신학교(현 가톨릭 대학교)에 진학한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1950년 5월 28일 시종품(4품)을 받았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안 되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신학교의 결정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귀가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는 일단 서울에 있는 송경섭 루카의 만념(萬念) 미싱 상회에 머무르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국군의 패주가 계속되자 피신을 결심하였고, 고광규 베드로,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과 함께 전라도로 출발하여 9월 20일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뒤 전기수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신학생 일행은 김정용 안토니오의 매형이 마련해 준 전동의 골방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9월 24일, 전기수 신학생과 고광규 신학생은 송경섭 가족의 안부를 전해 주려고 그의 처제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최계주 마리 골롬바 수녀를 찾아 나섰다. 당시 최 수녀는 근무지인 전주 성심 여자 중학교에서 쫓겨난 뒤 다른 교사 수녀와 함께 셋방 하나를 구해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그날 전동의 거처로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수녀들을 찾아갔다.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79위 첨례일’을 맞이하여 전주 승암산(현 전주 대성동의 치명자산)에 있는 이순이 루갈다 순교자 묘지를 참배하려는 것이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회고록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9월 25일) 오후에 그레고리오 신학생이 혼자서 또 찾아왔다. 내일 복자 첨례를 기하여 누갈다(즉 이순이 루갈다) 묘지에 참배 가겠으니, 길을 알려 달라고 …….”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수녀들을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체포되어 전주 정치 보위부(현 전주 중화산동 예수 병원 자리)로 끌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과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을 만났는데, 보위부에서는 전기수 신학생을 수녀들과 함께 수감하고,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따로 수감하였다. 이때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수녀들에게 “앞으로 몇 년이 갈지 모르니까 마음 편히 가지고 지내야 됩니다. …… 여기에서 치명할 각오합시다. 종교 박해니까요?”라고 하면서 권면하였다.
뒷날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을 만나게 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강인숙 발렌티나 수녀는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이 마지막으로 보여 준 순교 용덕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튿날(9월 26일) 아침 식사를 받자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열심히 식전 축문(즉 기도문)을 외우고 성호를 그으며, 이 음식은 천주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주시는 음식이니 달게 먹고 순교할 각오를 하자고 신덕에 불타오르는 열변으로 고요히 말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했습니다.”
북한군은 패주하기 전날인 9월 26일, 전기수 그레고리오와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고 가 사살하였다.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도 이런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에 그는 이튿날 북한군이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친구의 행방을 찾아 나섰고,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정치 보위부 뒷산 방공호 안에서 두 신학생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가 상한 상태였다고 한다. 며칠 뒤 이들의 시신은 교우들이 승암산 이순이 루갈다의 무덤 아래 안장하였다. 당시 전기수 그레고리오의 나이는 2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