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9 고광규 베드로

39. 고광규 베드로(1925-1950)

 

고광규(高光圭) 베드로는 1925년 7월 10일 전남 목포시 양동 125번지에서 고원주(高元柱) 아우구스티노와 김삼월(金三月) 마르타의 아들로 태어나 7월 17일 목포 성당(현 산정동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의 조카 고재영 야고보는 현재 광주대교구 사제이다.

1945년경 서울 천주 공교 신학교(현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한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은 재학 중에 6⋅25 전쟁을 겪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삭발례까지 받았다. 그는 신학교 당국의 결정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귀가하게 되자, 일단 서울에 있는 송경섭 루카의 만념 미싱 상회에 머무르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국군의 패주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고광규 베드로는 피신을 결심하고 전기수 그레고리오와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과 함께 전라도로 출발하여 9월 20일경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뒤 신학생 일행은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의 매형이 마련해 준 전동의 골방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9월 24일, 고광규 베르도 신학생은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과 함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최계주 마리 골롬바 수녀를 방문하였다. 만념 미싱 상회의 주인 송경섭 루카의 부탁대로, 그의 처제인 골롬바 수녀를 만나 안부를 전해 주려는 것이었다. 당시 골롬바 수녀는 전주 성심 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쫓겨난 뒤 다른 교사 수녀와 함께 셋방 하나를 구해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다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과 수녀들도 각각 체포되어 전주 정치 보위부(현 전주 중화산동 예수 병원 자리)로 압송되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회고록에는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이 정치 보위부에 잡혀 와 간첩 혐의로 문초를 받은 내용이 일부 수록되어 있다.

 

“이때 비로소 고 베드로 신학생도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신학생은 서울에서 세 명이 3일 전에 피난 온 것과 그중 한 명(안당 씨, 즉 김정용 안토니오)은 20리 밖의 누님 집에 약 먹으로 갔다는 것, 다른 한 명(그레고리오 씨, 즉 전기수 그레고리오)도 여기 있는 것을 다 말하며 우리는 아무 죄도 없으니 빨리 조사해서 내어 달라고 청한다. ‘뭐? 서울에서 왜 여기까지 왔어. 무전기 가지고 연락하려고 왔지 않나. 우리는 너희들이 전주에 도착하자 곧 뒤를 살피고 조사하고 있는데, 제일 주목받을 사람이 죄 없다고 하느만.’ 하며 혼을 낸다.”

 

그런 다음 보위부에서는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을 수녀들과 함께 수감하고,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은 그들과 분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감하였다.

북한군은 북으로 패주하기 전날인 9월 26일,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과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고 가 사살하였다. 그날 김정용 안토니오 신학생도 이런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에 그는 이튿날 북한군이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두 친구의 행방을 찾아 나섰고,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정치 보위부 뒷산 방공호 안에서 두 신학생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가 상한 상태였다고 한다. 며칠 뒤 이들의 시신은 교우들이 승암산 이순이 루갈다의 무덤 아래 안장하였다. 당시 고광규 베드로의 나이는 25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