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 앤서니 콜리어


4. 앤서니 콜리어 신부(1913-1950)

 

앤서니 콜리어(Peter Anthony Collier, 高 안토니오) 신부는 1913년 아일랜드 클로거헤드(Clogherhead)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스물다섯 살 되던 1938년 12월 21일 나반(Navan)시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39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입국한 뒤, 춘천지목구의 강릉 본당(현 임당동 본당)과 횡성 본당에서 보좌를 역임하였다. 태평양 전쟁 직후인 1941년 12월 일제 조선 총독부에서 앤서니 콜리어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는 강릉과 춘천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부터 춘천에서 연금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에 석방된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횡성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였고, 1950년 1월 5일에는 소양로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소양로 본당에 부임한 뒤 기존 한옥을 개조하여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하면서 의욕적으로 사목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중단되고 말았다. 본당 사목 시절,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신자들을 배려하는 마음과 사려 깊은 태도,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날,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본당 신자들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북한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음에도 지목구장 토마스 퀸란(T. Quinlan, 구 토마스) 몬시뇰을 방문하고 돌아와 인근에 살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는 포탄이 성당 가까이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성체를 옮겨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직접 성체를 영하였다. 그러고 나서 폭격이 점점 심해지자 신자들과 함께 성당 뒷마당에 있는 방공호로 피신한 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피신을 권유하였다.

 

“이곳은 아주 위험합니다. 당신들은 피하십시오. 저는 성당을 지키겠습니다.”

 

6월 27일 오전에는 북한군이 춘천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그날 오후 복사(또는 교리 교사)였던 김경호(가브리엘)와 함께, 토마스 퀸란 몬시뇰이 있는 죽림동 성당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중앙 로터리 부근에서 북한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북한군은 곧바로 앤서니 콜리어 신부와 김경호의 손을 등 뒤로 묶은 뒤 다시 서로 묶은 다음 소지품을 모두 압수하였다. 그러고는 앤서니 콜리어 신부를 향하여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나는 천주교 신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북한군이 다시 “당신 스파이지?” 하고 묻자, 콜리어 신부는 침착하게 “나는 가톨릭 신부요 선교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북한군은 앤서니 콜리어 신부와 김경호를 그들의 주둔지인 춘천 우체국(현 춘천시 소양로 3가 93)으로 데려간 뒤 한 장교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 둘을 앞세우고 춘천 고등학교 뒷길을 따라 공지천(孔之川, 또는 소양강변)으로 향하였다. 그러는 도중에 북한군은 앤서니 콜리어 신부와 김경호에게 처음 체포되었을 때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하였고, 이들은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얼마 뒤 그들 일행은 춘천 세무서(현 춘천시 중앙로 115)에서 30m가량 떨어진 경사로 앞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앤서니 콜리어 신부와 김경호를 멈추어 세우고는 ‘가족이나 친척, 유언할 것이 있는지?’를 묻었다. 신부가 ‘없다.’고 대답하자 곧바로 여러 차례 총을 발사하였고, 앤서니 콜리어 신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김경호를 끌어안았는데, 그 덕택에 김경호는 총에 맞았지만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앤서니 콜리어 신부의 나이는 37세였다. 며칠 뒤인 7월 4일, 피난에서 돌아오던 비신자들이 앤서니 콜리어 신부의 시신을 발견하여 순교 장소 인근에 안장하였다.

1951년 10월 9일,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은 유엔군의 도움 아래 교우들의 증언을 토대로 앤서니 콜리어 신부의 무덤을 정확히 확인한 뒤 그곳에서 그의 시신을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앤서니 콜리어 신부의 옷과 유해, 그가 생전에 간직하였던 성패(성인 메달)를 수습하였고, 10월 10일에는 그 시신을 춘천 죽림동 성당 경내로 이장하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