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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순교터1884년 2월 7일(양력 3월 4일)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신재순(申在淳) 아우구스티노는 여섯 살이 되던 1890년부터 전주 본당(현 전동 본당)의 보두네(F. X. Baudounet, 윤사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 이 마리아의 슬하에서 자랐다.
1900년 5월 4일 전라도 수류 본당(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 재임하던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마르첼리노) 신부는 제주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자, 함께 제주로 가서 자신을 도와줄 신자를 물색하였다. 그때 보두네 신부가 그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 이 마리아와 신재순 아우구스티노 모자였다. 이에 그들 모자는 그해 5월 26일 군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하여 사제관이 있던 대로동(大路洞, 현 제주시 삼도2동의 한짓골) 인근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때부터 모친 마리아는 라크루 신부의 식복사로, 신재순 아우구스티노는 복사로 일하면서 본당 일을 도왔다.
라크루 신부는 신재순 아우구스티노의 신심과 행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로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어 제게 귀중한 아이가 되고 있었는데 …….”
신재순 아우구스티노가 제주도에서 생활한 지 1년가량 지난 1901년 5월 5일에는 신축 교안(辛丑敎案)이 발생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교안의 주동자와 추종자들에게 쫓기거나 피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연례 피정에 참가하려고 제주를 떠나 있던 라크루 신부는 교안 발생 소식을 듣고는 5월 10일에 부랴부랴 제주로 귀환하였다.
5월 28일(음력 4월 11일), 교안의 주동자와 추종자들은 제주성에 진입한 뒤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면서 복사 신재순 아우구스티노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라크루 신부는 제주 동헌 인근에 있는 제주 군수 관사 곧 내아(內衙)에 있었는데, 신재순 아우구스티노가 그곳으로 오자 진위대(鎭衛隊)의 도움을 얻어 그를 관사 벽장에 숨겨 주었다. 바로 그 순간, 교안의 주동자들이 들이닥치자 대정 군수 채구석(蔡龜錫)은 ‘신재순이 벽장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고, 신재순 아우구스티노는 이내 벽장에서 끌려 나오고 말았다.
교안의 주동자들은 신재순 아우구스티노를 보자마자 그에게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의 뺨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