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박영옥 안드레아(1914-1950)
박영옥(朴永玉) 안드레아는 1914년 12월 29일 지금의 충남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 418번지에서 박성직(朴聖直)과 이우선(李右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 천주교 박해기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대대로 실천해 왔는데, 1867년 예산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서 체포되어 홍주(현 충남 홍성)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박 안드레아 회장이 그의 증조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박영옥 안드레아는 합덕 본당 소속의 매산 공소(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의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당시 공소 회장이 나이가 많아서 부회장인 박영옥 안드레아가 실제로 공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북한군이 신평 지역에 진입한 뒤인 1950년 8월 2일, 당진 내무서 신평 분소로 끌려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며칠 뒤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은, 가족들에게 “몸에 살점이 묻어나는 매질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때 다시 체포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합덕 성당으로 가서 필립 페랭(P. Perrin, 白文弼 필립보)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보고 돌아왔고, 그 뒤 가족들에게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박영옥 안드레아가 다시 체포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매산리에서 가까운 한정리의 처갓집(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177번지)에 피신해 있을 때 체포되어 당진 내무서로 끌려간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때 이곳에는 합덕 본당의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 그리고 원머리 공소(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의 박원근 바르나바 회장도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를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당진 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을 9월 28일 밤부터 29일 새벽까지 당진 읍내리의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처형하였다.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도 이때 순교한 것이 확실하다. 북한군의 학살이 이루어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송된 수감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학살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박원근 바르나바 회장은 뒷날 ‘안드레아 부회장도 당진 내무서에 함께 갇혀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의 시신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당시 박영옥 안드레아의 나이는 3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