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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순교터
52. 송해붕 요한 세례자(1926-1950)
송해붕(宋海鵬) 요한 세례자는 1926년 6월 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다남리(현 인천시 계양구 다남동)에서 서산(瑞山) 송씨 희진(熙鎭) 요셉과 회덕(懷德) 송씨 예분(禮分)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호는 공깃돌[小石]이다.
요한의 신앙은 어머니 마리아의 깊은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결혼할 때 「천주교 요리 문답」 한 권을 지니고 와서 틈틈이 독학하였고, 행주 본당(현 고양시 행주외동)까지 걸어 다니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분이다. 그 결과 요한은 1928년 12월 28일 인천 답동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게 되었고, 부친도 뒷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요한은 계양 초등학교를 거쳐 1944년 인천 공립 직업 학교(현 인천 기계 공업 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고, 경성대목구장 노기남 바오로 주교의 허락을 얻어 그해 덕원 신학교 중등과로 편입하였다. 공립 직업 학교 재학 시절에는 답동 성당에서 복사를 하였고, 늘 기도 생활에 열중하였으며, 매괴회(곧 로사리오회)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의 덕원 신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직전에 여름 방학으로 귀가하였다가 신학교로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6년 봄부터 요한은 지역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하여 야학을 시작하였다. 야학은 고향 인근인 계양면 귤현리(현 계양구 귤현동) 마을 회관에서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고촌 은행정(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으로 이전되었다. 은행정은 천주교 공소가 있던 마을이다. 이때 요한은 야학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이용하였고, 일부 어른들의 반대를 피하려고 한문과 윤리, 음악, 교리 교육 등을 병행하였다. 그는 교리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이렇게 다짐하곤 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리라. 아니, 예수님처럼 살리라. 예수님은 첫 번째 선교사.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해 뜨는 데서 해지는 곳,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다. …… 자랑스러운 내 나라 삼천리강토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선교에 앞장을 서리라.”
1947년 8월에는 고촌에서 멀지 않은 양촌 누산리(현 김포시 양촌읍 누산리) 공소의 마을에서도 야학을 열었다. 요한이 그곳에 가는 날이면 어린이들부터 청⋅장년층까지 공소 경당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요한을 따르는 학생과 예비 신자들이 점차 증가하자, 그는 1949년 은행정에 공소 경당 겸 야학 강습소를 건립하여 이듬해 3월에 축성식을 가지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이 경당은 처음에는 여섯 칸이었으나 나중에 열두 칸으로 증축되었다.
요한 세례자는 이처럼 사도 바오로와 같은 열정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저도 세례자 요한처럼 목을 바치겠습니다. 요한의 목을 베이소서.”라고 청원하였다. 또 은행정 경당을 건립할 때에는 후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신심 생활을 권면하였다. “죽고 나서 신심 생활 하료? 죽고 나서 성녀 되료? 살아생전에 주의 사도 되소.”
그 과정에서 요한의 활동을 질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고촌 은행정 마을의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이 야학과 교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천이 완전히 수복되면자 은행정 마을에서도 자치대와 경찰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요한에게 북한군 앞잡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요한은 공산 치하 때 부역을 하다가 치안대원이 된 사람에게 체포되어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쓴 채 총살되고 말았다. 그때가 1950년 10월 11일로, 장소는 천등 고개(현 김포시 고촌읍 풍곡리⋅신곡리)였다. 당시 송해붕 요한 세례자의 나이는 24세였다.
그 뒤 가족들은 1951년에 당시의 자치대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함으로써 송해붕 요한 세례자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1956년 6월 15일 천등 고개에서 요한의 유해를 발굴하여 계양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그의 몸에서는 묵주와 피 묻은 소화 데레사의 상본이 발견되었고, 다음과 같은 이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널빤지에 하얗게 핀 눈꽃. 그때는 겨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얀 성에가 질서 정연하게 널빤지를 덮고 있어 꼭 자잘한 꽃처럼 보였다. 영락없는 백장미, 잔꽃 송이였다. 금방이라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백장미군요. 영락없는 장미예요. 향기가 나요. 향기가 나요.’ ‘우리 선생님 성인 되셨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웬 이런 장미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