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윤의병 바오로 신부(1889-1950?)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는 1889년 10월 21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서 파평 윤씨 상우(相雨) 시몬과 김 바르바라의 차남으로 태어나 12월 15일 유아 세례를 받았고, 인근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의 용진골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868년 수원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윤자호(尹滋鎬) 바오로는 그의 조부이고,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그의 당질이다.
유작으로는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경향잡지』에 연재하다가 중단되어 미완성에 그친 박해 소설 「은화」(隱花)가 있다. 이때 그가 사용하였던 아호이자 필명은 죽총(竹叢)이다. 소설 「은화」는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황해도 은율 본당(현 황해남도 은율읍 남천리)에 재임하던 시절, 그를 신학교에 보낸 이계중 요한 사도 신부가 1977년 6월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소년 윤의병 바오로는 용진골에 살던 백부 윤상운(尹相雲)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5년 9월 23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생 시절 윤의병 바오로는 학업 면에서나 신앙 면에서 매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당질 윤형중 마태오 신부가 그의 삶을 보고 사제의 모범으로 삼을 정도였다.
1920년 9월 18일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민덕효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은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9월 23일 충북 장호원 본당(현 음성 감곡 본당)의 보좌 신부 겸 괴산 고마리 본당(현 증평 본당의 전신)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1년 4월 고마리 성당 옆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숭애 강습소(崇愛義塾의 전신)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청년 단체인 예수 성심회를 설립하였으며, 틈틈이 천주교 박해기의 교우촌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순교자들과 관련된 구전을 수집하였다. 또 1927년에는 정규량 레오 신부와 최종철 마르코 신부와 함께 1866년의 병인박해 순교지였던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을 답사한 적도 있었다.
1932년 9월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위궤양과 폐렴 등으로 말미암아 경기도 행주 본당(현 고양시 행주외동)으로 전임되어 요양을 겸하여 사목하였다. 그런 다음 1935년 1월 황해도의 은율 본당(현 은율군 은율읍)의 주임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성모 유치원(은율 유치원의 전신)을 건립하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신자들에게 순교 신심을 함양시켜 주려고 노력하였고, 신자 피정과 교리 강습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종교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38년 5월 9일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순교자 이달회 베드로의 무덤(현 송화군 천동면 대야리) 앞에 순교비를 건립하였고, 기해박해 100주년이 되는 1939년에는 박해기의 피신처였던 구월산에서 순교자 현양 행사를 개최하였다. 『경향잡지』에 박해 소설 「은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뿐만 아니라 1940년에는 은율군 서부면 장암리 야산에 있는 순교자 무덤 앞에 묘비를 건립하였다.
윤의병 바오로 신부는 일제 강점기를 보내고 1945년에 8⋅15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곧이어 닥친 북한 노동당의 종교 탄압으로 사목 활동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하였다. 특히 1950년도에 접어들면서 본당 신부의 안전이 염려되는 상황에 이르자 신자들은 윤의병 바오로 신부에게 월남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교의 명령 없이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당을 지켰다.
1950년 6월 24일, 마침내 염려하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날 새벽 2시경, 정치 보위부원 세 명이 북한 노동당의 회관으로 사용하는 성당으로 찾아와 윤의병 바오로 신부의 소재를 파악하고 돌아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의병 신부가 납치된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으므로 사제관 식복사 필로메나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납치된 것을 알게 된 본당 신자들은 신부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윤의병 신부가 은율 정치 보위부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며칠 뒤에는 정치 보위부원들이 그를 큰 자루에 담아 다른 곳으로 끌고 간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송림 본당(현 황해북도 송림시 월봉동)의 유재옥 프란치스코 신부, 송화 본당(현 황해남도 송화군 송화읍)의 서기창 안드레아 신부, 사리원 본당(현 황해남도 사리원시 북일동)의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와 마찬가지로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학살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