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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당
65.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1912-1950?)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는 1912년 7월 15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에서 김덕희(金悳熙)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3년 9월 서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9년에 대⋅소신학교가 분리되면서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를 다니다가 1933년 2월 장금구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김필현 루도비코 신학생과 함께 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김교명 베네딕토는 대신학교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1939년 6월 24일 춘천지목구의 첫 번째 한국인 사제로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부임하여 1942년 5월까지 사목하였다. 이 무렵 평양대목구장 서리를 겸하던 노기남 바오로 주교는 일제 당국이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연금하면서 평양대목구에 사제가 부족하게 되자, 1942년 5월 서울대목구 신부들을 이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때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도 평양대목구로 파견되어 기림리 본당(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10월 진남포 본당(현 남포시 와우도구역 룡정동)의 보좌로 전임되었고, 1943년 4월에 의주 본당(현 평안북도 의주읍)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김교명 신부는 사목하는 동안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어버이처럼 어린이들을 대함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존경과 협조를 받았다.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의주 본당에서 일제 강점기 말의 교회 탄압과, 1945년 8⋅15 광복 이후의 공산 치하를 모두 겪어야만 하였다. 그는 사목 활동과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원만한 성품과 자상함으로 이를 극복하였고, 해마다 복자 성월이 되면 천주교 박해기에 선교사들과 교회 밀사들이 왕래하던 의주 변문을 찾아가 기도하면서 순교자들을 기렸다. 또한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고자 주일 미사 강론과 신심 단체 행사 가운데 순교 복자들의 행적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점차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이 심해지면서 월남하는 신자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고향인 양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친지들이 그에게 ‘남으로 내려와 안전하게 사목하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묵묵히 신자들이 있는 의주 본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언젠가는 의주 본당의 박덕현 마태오 회장이 의주 보안서에 불려가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에 관한 정보를 보고하도록 강요당한 적이 있었다. 이에 박덕현 마태오 회장이 김교명 신부에게 가서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함께 월남하자고 권유하였으나,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신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1949년 5월 14일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납치된 것을 시작으로 북한 곳곳에서 신부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이때 거의 연금 상태에 있었으므로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밤에서 26일 새벽 사이,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의주 보안서에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신의주 보안서로 이송되었다.
그 뒤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북한 인민군이 패주하기 시작하였을 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