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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성당, 죽림동성당
7. 패트릭 라일리 신부(1915-1950)
패트릭 라일리(Patrick Reilly, 羅 파트리치오) 신부는 1915년 10월 21일 아일랜드 웨스트미스의 드럼레니(Drumraney)에서 토머스 라일리(Thomas Reilly)와 앨리스 라일리(Alice Reilly)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34년 아일랜드 나반(Navan)시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뒤 영국 클리프턴(Clifton)교구에서 사목하였다.
패트릭 라일리 신부는 서른두 살이던 1947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공부한 뒤 1948년 1월 14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그해 5월 원주 본당(현 원주교구 원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였고, 1949년 9월 초 묵호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원주 본당 재임 시절에 패트릭 라일리는 미사 때마다 성당을 채우는 많은 신자를 만날 수 있었고, 대축일이면 몇 시간씩 판공성사 순서를 기다리는 신자들을 보는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신자가 많지 않았던 묵호에서는 새로 매입한 가옥을 임시 성당으로 삼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사목해야만 하였다.
묵호 본당에서 사목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에는 북한군이 묵호 가까이에 상륙하였다. 패트릭 라일리 신부는 삼척 성당으로 가서 다른 신부들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협의하고 돌아와 식복사와 함께 성당을 지켰다. 6월 29일 만우리(현 동해시 만우동)에 사는 전교회장 남봉길(프란치스코)이 성당으로 찾아와 피신을 권유하자, 라일리 신부는 “양 떼를 버리고 피신할 수 없소. 성당을 지키다가 죽겠소.”라고 말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거듭된 권유를 받아들여 일단 식복사와 함께 만우리에 있는 남 회장의 집으로 가서 머물기로 하였다.
패트릭 라일리 신부는 거의 한 달 동안 남 회장의 골방에서 거처하였다. 그는 미사 때가 되면 골방에서 나와 미사를 집전하곤 하였는데, 한번은 비신자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북한군들은 만우리 마을로 몰려와 수색한 뒤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패트릭 라일리 신부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7월 28일(또는 29일) 수색 때 패트릭 라일리 신부를 발견하고는 남봉길 회장과 식복사 등과 함께 체포하였다. 이때 북한군들은 패트릭 라일리 신부의 짐에서 찾아낸 라디오를 보고 ‘스파이 용품이 아니냐?’며 추궁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패트릭 라일리 신부를 묶으려고 하자, 그는 북한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을 해치려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소. 또한 우리나라가 당신 나라나 다른 어떤 공산 국가들에게 대항한 적도 없소. 이 밧줄을 풀어 주시오!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오. 도망칠 수 있는 곳도 없소.”
그 뒤 남 회장과 식복사는 석방되었지만, 패트릭 라일리 신부는 묵호 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8월 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 방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강릉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패트릭 라일리 신부와 포로들이 옥계면 밤재굴(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16-2 철도 터널)에 이르자, 북한군들이 갑자기 일행을 모두 멈춰 세우고는 총살해 버린 것이다. 당시 패트릭 라일리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이 패트릭 라일리 신부의 시신을 발견하여 인근에 가매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 9월 유엔군의 강릉 수복 이후 군종 사제인 이경재(알렉산데르) 신부와 해군 백기조 대령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었다. 패트릭 라일리 신부의 시신은 발한리 묵호 경비 사령부 인근(현 동해시 발한동 시립 발한 도서관 주차장)에 가매장되었다가 묵호 성당 경내로 이장되었다. 이어 1951년 여름에는 그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어 춘천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고, 10월 10일에 장례 미사가 봉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