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2 서원석 요셉

72. 서원석 요셉 수녀(1914-1950?)

 

서원석(徐元錫) 요셉 수녀는 1914년 4월 27일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여규식 마리아의 장녀로 평안북도 의주 성당(옛 의주군 의주읍 동외동) 구내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안젤라였다. 부친 서정요 프란치스코와 셋째 동생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 그리고 다섯째 동생 서경석 마르코는 1950년에 서원석 요셉 수녀와 마찬가지로 공산 정권에 희생된 ‘하느님의 종’들이다. 서원석 요셉 수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철저한 신앙 안에서 자랐다. 천성이 착하고 말이 없던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맡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는 성격이었다.

1930년경, 뒤늦게 초등학교를 마친 서원석 요셉 수녀는 1932년 6월 27일에 설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첫 지원자로 입회하였다. 이때 받은 수도명이 요셉이다. 그녀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중등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며, 1940년 6월 27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그 뒤 평안북도 비현 본당(현 피현읍)의 성심 학교 교사를 하며 교리와 성가를 지도하고, 평양 관후리 본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의 성모 보통학교 교사를 하며 본당 성가대 지도를 맡았다.

서원석 요셉 수녀는 누가 무엇을 부탁하든지 거절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수도자로서 순명 정신을 철저히 지켜 동료들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장정온 아네타 원장 수녀는 겸손과 순명의 덕행이 뛰어난 서원석 요셉 수녀를 ‘순명의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서원석 요셉 수녀는 수도회의 지원자 교육과 상수구리(현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 수도회 모원의 분원장을 맡았으나 그 책임을 면하게 해 주기를 간청하여 이를 허락받았고, 대신 후배 골롬바 수녀가 그 직책을 맡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분원장 수녀에게 순명하였다.

1944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평양의 한 양조장 사택에 살며 혼자서 세 명의 아들을 돌보았다. 서원석 요셉 수녀는 수녀원 바로 옆에 사는 가족을 지켜보며 도와줄 수 없어 고민하였고, 사정을 알게 된 수도회 장상은 그녀에게 특별히 일주일에 한 번씩 낮 시간에 집에 방문하여 가족을 보살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50년 5월 14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 수도원이 강제 압류되면서 임시로 해산해야 하였다. 이때부터 서원석 요셉 수녀는 장상의 명에 따라 평복으로 갈아입고 귀가하여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며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0월 8일 밤 11시경, 아버지 서정요 프란치스가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고, 뒤이어 동생 서경석 마르코도 그들에게 연행되자, 서원석 요셉 수녀는 그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 뒤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뒤에 확인한 결과, 10월 8일 밤에 양조장 사택에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갔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루어 볼 때, 정치 보위부로 가족을 찾으러 갔던 서원석 요셉 수녀도 그들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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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