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강영걸 바오로 신부(1904-1950)
강영걸(姜永杰) 바오로 신부는 1904년 평안남도 평원군 노지면 추홍리(현 평원군 문흥리)에서 강규환과 김규선의 2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31년 5월 30일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지목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평양지목구청에서 일하다가 메리놀 외방 전교회가 일본에 진출하자 그곳으로 건너가 4년가량 재일 교포 사목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평안남도 중화 본당(현 평남 중화군 중화읍) 주임으로 임명된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선교에 힘쓰면서 지방민들의 문맹 퇴치를 위하여 성심 학원을 개설하였고, 빈민 아동 교육 기관으로 성심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수확한 곡물로 교무금을 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교회 운영과 활동을 유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 청년회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상가(喪家) 돕기 운동은 물론 지역 선교 사업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교회와 장상의 명이라면 절대 순명하는 사제였고, 신자들에게는 아주 엄한 사제였으며, 강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평도 받았다. 입교시키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입교시키고야 마는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일본 경찰이 신사참배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들을 트집 잡아 교회를 탄압하려고 하자, 갖은 수완을 발휘하여 무사히 넘긴 적도 있었다.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1939년 1월 교토의 재일 교포 신자들을 위하여 다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942년 2월 평안북도 의주 본당(현 평북 의주군 의주읍)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그 뒤 1943년 6월에는 평안북도 운향시 본당(현 평북 용천군 덕승리)의 주임으로, 1944년 4월에는 정주 본당(현 평북 정주시 성남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11월부터 평안남도 마산 본당(현 평남 대동군 마산리)의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당시에는 기존의 강서 본당(현 남포특별시 강서군 덕흥동)이 마산 본당에 통합되어 있었다.
의주 본당 재임 시절에는 일제 당국의 철저한 쇠붙이 공출 정책에도 성당 종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기도 하였다. 운향시 본당 재임 시절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믿음에 동요가 일어날 위험에 놓이자,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신자들이 모두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지도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는 마산 본당 신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거나 강압에 굴하지 않도록 지도하는 한편, 평양의 관후리 주교좌성당 건립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또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된 뒤 인민 위원회에서 본당의 성모 학원 건물을 빼앗으려고 하자 이에 맞서 대항한 일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이 점차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마산 지역의 인민 위원회 직원들도 자주 성당으로 찾아와 강영걸 바오로 신부를 괴롭히고 감시하였다. 이때 동생인 강영수(요한)가 형 강영걸 신부를 찾아가 함께 월남하자고 권유하자, 그는 “내 앞에 있는 양, 내 뒤에 있는 양, 단 한 마리도 없어야 나도 내려갈 수 있다.”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1950년 6월 24일. 아침 미사를 봉헌한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본당의 현용국(비오) 회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쳤다. 바로 그때, 인민 위원회 직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성당으로 찾아왔다. 식사를 마친 현 회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강영걸 신부를 찾아 곧바로 그를 체포하여 어딘가로 연행하였다. 오전 9시경이었다.
그 뒤 강영걸 바오로 신부는 평양으로 압송되어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런 다음 1950년 9월 23일경,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에 쫓겨 패퇴하던 북한군으로 말미암아, 수감되어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