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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청 명동대성당
80. 송경섭 루카(1916-1950?)
송경섭(宋京燮) 루카는 1916년 9월 8일 제주도(또는 목포)에서 송창만 바오로와 김순 헬레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목포 성당(현 산정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열두 살 때인 1928년 8월 14일이었다. 당시 부친은 목포에서 사업을 하였다. 송경섭 루카는 이후 목포 상업 학교를 졸업하였다.
장성한 뒤 송경섭 루카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고, 아버지 송창만 바오로가 1936년 11월에 설립한 만념(萬念) 미싱 상회(현 을지로 입구)의 일을 도왔다. 송경섭 루카가 최복주 엘리사벳을 아내로 맞이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38년경에 그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이듬해에 설립된 흥아 미싱 제조 합명 회사를 맡아 운영하였고, 1940년 2월 초에 회사를 서울로 옮기면서 귀국하였다.
일찍이 송경섭 루카는 사제가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남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맡았다. 남동생 송순섭 요한도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소의 길을 가다가 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송경섭 루카의 마음에는 언제나 사제 성소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섯째 딸을 낳은 뒤, 자식들에게 자신의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신부로 봉헌할 동생을 하나 보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 뒤 송경섭 루카는 막내아들 송진 발렌티노를 얻었고, 송 발렌티노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뒷날 사제가 되었다. 또 송경섭 루카의 여동생 송 데레사, 부인 엘리사벳의 여동생 최 골롬바, 송경섭의 다섯째 딸 송 로사 등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송경섭 루카는 신심이 두터웠던 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는 날마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 기도와 묵주 기도를 바쳤고, 명동 본당 청년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조종국 마르코 회장을 가까이에서 도와주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청년들의 활동과 사회 참여를 위하여 헌신하며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돌봐 주었다. 당시 그의 만념 미싱 상회는 명동 본당 청년들의 모임 장소 구실도 하였다. 송경섭 루카는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차별하지 않았고, 둥근 식탁을 만들어 한 자리에서 모두 함께 식사하도록 배려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송경섭 루카는 서울 집에 머물러 있다가 8월 말경 큰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두 딸을 데리고 상경하여 만념 미싱 상회 일을 보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상점과 집으로 피신해 온 신자들을 받아들였고, 신학교 휴교로 고향에 내려가는 신학생들, 곧 전기수 그레고리오와 고광규 베드로와 김정용 안토니오 등을 잠시 보살펴 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이튿날인 9월 16일 밤, 송경섭 루카는 세 딸들과 몇몇 청년들과 함께 만념 미싱 상회에서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밤 11시경(또는 12시경) 내무서원들이 만념 미싱 상회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종교 문제로 조사할 것이 있다.”라고 하면서 다짜고짜 송경섭 루카를 연행해 갔다. 이튿날 가족들은 송경섭 루카를 찾으러 내무서 등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그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종교 지도층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북송되었거나 반동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