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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청 명동대성당
81. 정남규 요한 세례자(1886-1950?)
정남규(鄭南奎) 요한 세례자는 1886년 6월 15일(음력 5월 14일) 서울 옥동(현 종로구 옥인동)에서 정창인(鄭昌寅) 요셉과 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9년 9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성 학당에 입학하여 1901년 6월까지 한문과와 보통과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4월 2일에는 어머니 최 마리아의 영향으로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정남규 요한 세례자는 1906년 1월에 탁지부 측량 강습생에 선발되었고, 그해 12월 탁지부 기수(技手)로 임용되어 조사국 양지과(量地課)에서 일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인 1910년부터 1920년까지는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에서 근무하였고,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경성부 서기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23년에 경성대목구장 뮈텔(G. Mutel, 민덕효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권유에 따라 관직에서 떠나 교회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 뒤 정남규 요한 세례자는 1924년 10월에 설립된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 재단’ 준비와 설립에 참여하였고, 20여 년 동안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의 총회장으로 봉사하였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정남규 요한 세례자 회장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을 좌우명으로 삼고 생활하였다. 그는 차필순(車弼順) 루치아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는데,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불쌍한 이웃을 위해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물욕에 눈이 어두우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평소에도 늘 불우 이웃에 대한 애긍에 관심이 많았던 정남규 요한 세례자는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924년 4월 종현 본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애긍회(愛矜會)를 조직한 뒤 사고무친한 노인들을 종현 성당에 수용하여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1926년 11월 20일 정남규 요한 세례자 회장은 경성 황금정 2정목(현 을지로 1가)에 이름도 없는 양로원을 설립하였다. 이 양로원은 초기에 몇몇 교회 유지들로부터 보조를 받았지만, 얼마 뒤부터는 정 요한 세례자 회장이 모든 운영을 혼자 부담하였다. 그 뒤 보살펴야 하는 노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그는 1930년 3월 23일 양로원을 하왕십리로 이전하였고, 1936년 11월 4일에는 교회 측과 협의하여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송정리(현 성동구 송정동)에 집을 지은 뒤 양로원을 다시 이전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교회 안팎으로부터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위로하라는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주님의 사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정남규 요한 세례자 회장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925년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이 결정된 뒤 뮈텔 주교가 황사영의 「백서」 원본을 교황청에 보낼 때, 그 사본을 필사한 사람이 바로 정남규 회장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남규 요한 세례자 회장은 피난을 가지 않고 입정동 집에 머물렀다. 그때 그는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내무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는데, 내무서원이 ‘천주교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자 ‘애주애인하기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로도 그는 집에서 머물다가 1950년 9월 17일 새벽 1시경 집으로 들이닥친 십여 명의 보안서원과 청년들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정남규 요한 세례자는 다른 종교 지도층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북송되었거나 반동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