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1901-1950)
패트릭 브레넌(Patrick Brennan, 安 파트리치오) 몬시뇰은 1901년 3월 13일 미국 시카고에서 패트릭 브레넌(Patrick Thomas Brennan)과 제인 고먼(Jane Gorman)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물한 살 되던 1922년에 시카고의 예비 신학교를 졸업하고 먼델라인(Mundelein)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8년 4월 14일 사제품을 받고 교구 사제로 사목하였다.
1936년에 패트릭 브레넌 신부는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였다. 이듬해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입국한 뒤 전라도 광주에서 생활하였고, 1939년 7월부터 춘천지목구의 원주 본당(현 원동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패트릭 브레넌 신부는 일제 조선 총독부로 말미암아 감금되었고, 이듬해 4월 미국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1946년 한국에 재입국한 패트릭 브레넌 신부는 이듬해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아시아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49년 11월 2일 제4대 광주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은 경리 책임자 하롤드 헨리(H. Henry, 현 하롤드) 신부와 함께 목포의 지목구청을 지키고 있었다. 6월 30일에는 서울에 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한국 지부장 게라티(B. Geraghty, 지 베르나르도) 신부가 목포를 경유하여 부산으로 갔고, 7월 16일에는 미국 대사관의 맥도날드(McDonald) 부영사가 브레넌 몬시뇰을 찾아와 피신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브레넌 몬시뇰은 곧바로 헨리 신부에게 목포에 있는 젊은 선교사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도록 하였다.
얼마 뒤 준비를 마친 헨리 신부가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에게 “함께 부산으로 가셔야 합니다.”라고 권유하자, 그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헨리 신부가 다시 “그러면 저도 남겠습니다.”라고 하자,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이 악화되면 섬으로 피신할 것입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헨리 신부를 부산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7월 24일 아침,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은 북한군이 목포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묵주 기도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북한군이 찾아와 목포 본당의 토머스 쿠삭(T. Cusack, 고 토마스) 주임 신부와 존 오브라이언(J. O’Brien, 오 요한) 보좌 신부를 불러내어 목포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하였다. 7월 30일 주일에는 북한군이 다시 성당에 와서 토마스 쿠삭 신부에게 신자 명단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북한군들은 브레넌 몬시뇰과 쿠삭 신부, 존 오브라이언 신부를 함께 연행하여 목포 경찰서에 감금하였다가 광주 교도소로 이송하였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8월 26일에는 미군 마카루미(A.Y. Makaroumis) 중위가 다른 군인 두 명과 함께 교도소로 끌려왔다. 그동안 선교사들은 열악한 식사와 심문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져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담요 석 장조차 다른 수감자들에게 양보하였다. 또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은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결국 잘 될 것이다.”라며 모두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였고, 교도소 창문 너머 들려오는 새소리에 “노래하는 새는 희망의 전령”이라고 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얼마 뒤 북한군들은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과 함께 수감되어 있던 서른두 명을 끌어낸 뒤 밤을 이용하여 서울 방향으로 이송하였다. 대전 부근에 이르러 트럭이 고장 나자, 일행을 모두 도보로 이동시켰다. 이때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은 매우 힘들어하면서도 부상 때문에 고생하는 마카루미 중위를 더 염려해 주었다고 한다. 대전에 도착한 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은 임시 수용소로 이용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감금되었고, 미군들은 대전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브레넌 몬시뇰 일행은 그곳에서 강만수(요셉)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들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과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수도원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모두 처형하였다.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도 이때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4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