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8 쥘리앵 공베르

28. 쥘리앵 공베르 신부(1877-1950)

 

쥘리앵 공베르(Julien Gombert, 孔安世 율리아노) 신부는 1877년 9월 7일, 프랑스 로데즈(Rodez)교구에 속한 아베롱(Aveyron)의 캉불라제(Camboulazet)에서 조제프 공베르(Joseph Gombert)와 마리 라콩브(Marie Lacombe)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종’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신부는 쥘리앵 공베르 신부의 형이다.

쥘리앵 공베르는 로데즈 대신학교에서 삭발례를 받은 뒤 1898년 9월 23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1900년 6월 24일 형 앙투안 공베르와 함께 사제품을 받고 조선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부산을 통하여 한국 땅을 밟은 뒤 1900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뒤 그는 공주 질울(현 공주시 정안면 고성리) 교우촌으로 가서 한국말을 배웠고, 1901년 4월 27일 부여 홍산 본당(현 금사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쥘리앵 공베르 신부는 먼저 홍산 가덕리(현 부여군 옥산면)에 거처를 정하였다가 6월 무렵 홍산 쇠양이(현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틈틈이 성당 건축을 계속하여 1906년 4월 초에 완공하였다. 이 성당은 1913년 9월 2일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민덕효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되었다.

1915년 11월 공베르 신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19년 11월 금사리 본당으로 돌아왔고, 1923년 6월 논산 본당(현 논산 부창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7년 말에 논산 성당을 신축하였고, 1933년에는 미취학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소화 학술 강습소(小花學術講習所, 곧 소화 학원)를 설립하였다. 1934년 말 프랑스로 휴가를 다녀온 뒤 1936년 여름부터 다시 논산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였고, 1942년 5월 말부터 휴양차 서울 주교관에서 거처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7년 12월에 그는 인천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월 24일은 공베르 형제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혜화동에 있는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지도 사제로 있었으므로 쥘리앵 공베르 신부는 상경하여 형과 함께 축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때 성신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셀레스탱 코요스(C. Coyos, 구인덕 첼레스티노) 신부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7월 15일에 그들은 가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마리 메히틸드(M. Mechtilde) 수녀 등 네 명의 수녀와 함께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서울 소공동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쥘리앵 공베르 신부는 수감된 동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재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서 7월 19일에는 일행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으며, 9월 5일에는 평양 수용소를 떠나 9월 11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 일행은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10월 31일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쇠약해져 있던 공베르 형제 신부는 행진 과정에서 더욱 탈진하였고, 11월 8일 중강진에 도착한 뒤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 북한군들은 운동을 핑계 삼아 일행들을 혹한 속으로 불러내곤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형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먼저 선종하였고, 이튿날에는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가 선종하였다. 1950년 11월 13일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그들 형제는 폴 비예모(P. Villemot, 우 바오로) 신부 옆에 조악하게 마련된 무덤에 묻혔다.

이에 앞서 쥘리앵 공베르 신부는 임종하는 형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형님은 하느님을 뵈러 가실 겁니다. 형님,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가세요. …··· 주님 곁에 가시거든 저를 불러 주십시오.” 또 자신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으제니(Eugénie du S.C. Demeusy) 수녀에게는 “하느님이 수녀님과 함께 계십니다. …··· 나는 그분께 가는 것이 기뻐요.”라는 말을 남겼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