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 백응만 다마소


3. 백응만 다마소 신부(1919-1950)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는 1919년 12월 10일 황해도 신계군 고면 태을리 삼차동(현 황해북도 신계군 태을리 셋째골)에서 백명실(가브리엘)과 이 마리아의 5남 5녀 가운데 7남으로 태어났다. 뒷날 부산교구 소속 사제로 사목하였던 백응복(스테파노) 신부는 그의 동생이다.

백응만 다마소는 열다섯 살이 되던 1934년에 소신학교인 서울의 동성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9년에는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일제 조선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용산 신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함경도의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이어 가야만 하였다. 한편 그의 가족들은 그가 소신학교에 다닐 때, 강원도 이천 본당의 사목 관할 지역인 이천면 향교리(현 이천읍)로 이주하였다.

백응만 다마소는 언제나 화를 내지도,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착한 형님’과 같이 언제나 미소와 작은 목소리로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신학생이었다. 덕원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1945년 11월 21일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그날로 서울 혜화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7월 초에 주임 신부가 공석이었던 춘천지목구 평강 본당의 4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춘천지목구장 서리를 맡고 있었던 서울대목구장 노기남(바오로) 주교가, 목자 없이 방황하는 평강 지역 신자들을 돌봐 주도록 백응만 다마소 신부를 그곳 주임 신부로 임명한 것이다. 평강 성당은 삼팔선 이북인 강원도 평강군 군내면 서변리(현 평강군 평강읍)에 있었다.

당시는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삼팔선 이북에서 사목하던 많은 성직자가 남하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오히려 삼팔선 이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때 신학생이었던 동생 백응복 스테파노가 이 사실을 알고 찾아가 ‘가지 마라. 가면 백발백중 죽는다.’고 하였지만,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 평강으로 갈 때는 알리지도 않고 떠났다고 한다. 장상의 말씀에 순명하고, 목자의 본분을 다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목하던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1949년 4월 초 평강 본당의 사제관에서 체포되었다. 북한 노동당원들은 이때 백응만 다마소 신부를 끌어내 양팔을 뒤로 묶고 눈을 가렸으며, 밧줄로 묶은 맷돌을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게 한 뒤 원산을 거쳐 평양 감옥으로 압송하였다.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여러 달 동안 옥중에서 많은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 1950년 1월 초 옥에서 병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병사 직후 백응만 다마소 신부의 시신은 평양 대동군 용산리의 공동묘지(현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산동)에 묻혔다. 그때 덕원 수도원의 임 콘라도 수사가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는 남하하던 길에 용산 공동묘지에 들렀고, 그곳에서 백응만 다마소 신부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작은 나무 푯말에 ‘백응만의 무덤[白應萬之墓]’이라고 적어 무덤 앞에 꽂아 두고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