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30 조제프 카다르

30. 조제프 카다르 신부(1878-1950)

 

조제프 카다르(Joseph François Cadars, 姜達淳 요셉) 신부는 1878년 9월 27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레다스(Lédas)에서 프랑수아 카다르(François Cadars)와 쥘리 부투네(Julie Boutoune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6월 14일 알비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1907년 9월 17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고, 조선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되어 1909년 1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국어 공부를 마친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1909년 5월 1일 전남 계량(노안) 본당(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 다시 계량 본당으로 돌아왔다. 이어 1920년 6월 20일 전북 되재 본당(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의 주임, 1922년 5월 7일 전북 나바위 본당(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의 주임을 역임하였고, 1929년 5월 25일 경북 왜관 본당(현 칠곡군 왜관읍)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4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가 돌아온 그는 11월 29일 경북 경주 본당(현 성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사목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4월 대구 남산 성당에 연금되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석방된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프랑스에서 휴양한 뒤 돌아와 1949년 3월 21일 프란치스코회 대전 수도원의 임시 관리자이자 목동 준본당의 임시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로는 거의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자신에게 맡겨진 성당과 수도원을 책임지고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그곳에 남아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8월 16일(또는 17일)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19-2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어 8월 29일에는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9월 18일 만포(현 자강도 만포시)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해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동료 선교사들과 만났다.

그 뒤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고산진(현 만포시 고산리)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만포로 돌아왔고,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만포에서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으로, 다시 하창리(현 중강군 상장리)로 이어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이질과 손의 상처로 생긴 괴저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동료들을 북돋아 주고 격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셀레스탱 코요스(C. Coyos, 구인덕 첼레스티노) 신부와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하창리 수용소에 도착한 지 한 달 남짓 된 12월 17일 저녁, 조제프 카다르 신부는 동료 조제프 뷜토(Joseph Bulteau, 오필도 요셉)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평소대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동료들은 그의 시신을 하창리 수용소 인근에 안장하였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 의탁하였고, 수첩 안에는 ‘자녀로서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내용을 적어 두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