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1903-1950)
김(金)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1903년 10월 18일에 경기도 파주 갈곡리(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에서 옹기장이 김화서 베드로와 김인순 마리아의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아기였을 때 박해로 체포된 어머니 등에 업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5일 평양 교화소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는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의 동생이다.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1921년 9월 8일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1928년 8월 14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이에 앞서 1926년 9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분원으로 파견되었는데, 주로 봉삼 유치원의 소임과 분원 살림을 맡았다.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애주애인의 덕이 뛰어났고, 근면 성실하면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가르침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었다.
1945년의 8⋅15 광복 이후 북한 천주교회가 공산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음에도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동료 수녀들과 함께 유치원 사도직과 분원 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산 정권의 탄압은 점차 심해졌고, 일요일에도 사람들을 동원하여 노동을 시킴으로써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제대 위에도 십자가 대신 김일성의 사진을 걸도록 지시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1948년 7월 24일부터는 수녀들에게 ‘수도복을 벗고 가르치도록 하고, 혁명 사업에 협조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수녀들은 모두 이를 거절하였다. 그때부터 공산 당국에서는 수녀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 17일에는 매화동 본당의 주임 이여구(李汝球) 마티아 신부가 피랍되었고, 성당마저 몰수되었다. 그 결과 매화동에는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를 비롯하여 김정자 안젤라 수녀,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만 남게 되었는데, 10월 5일 밤 2시경에는 근처에 살던 신자 요셉이 찾아와 ‘진작부터 죽이려던 회장과 강 수녀를 10월 18일에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뒤로 수녀들은 매일 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묵주를 손에 쥔 채 선종을 준비하였다.
1950년 10월 15일경 새벽 5시, 북한 노동당원들이 매화동으로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와 동료 수녀들은 일단 이웃에 사는 김병률 씨의 집으로 가서 숨었지만, 얼마 안 되어 발각될 순간이 다가왔다. 수녀들은 함께 “주여, 당신 의향대로 되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또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가 “지금 이 자리를 피할 도리가 없으니 다 같이 십자 성호를 긋고 상등 통회를 진심으로 발하고 치명장으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자, 모두 용기를 얻어 함께 북한 노동당원들 앞으로 나갔다.
북한 노동당원들은 곧 체포해 온 오륙십 명의 교우들을 수녀들 앞에 묶어 놓고 매질하거나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수녀들도 때리고 찌르고 베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정자 안젤라 수녀가 가장 먼저 사망하였다. 그때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수많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목숨만 붙어 있었는데, 동네 할머니 몇 명이 힘겹게 들것에 실어 수녀원에 데려다 놓은 지 이틀 만인 10월 17일에 조용히 선종하였다. 당시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의 나이는 47세였다. 강 마리 레지스 수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여성 신자들 몇몇이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의 시신에 수도복을 찾아 입히고 관을 짜서 입관하였다. 그러나 안장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수녀원 앞마당에 안치하였다가 11월 2일에 장례를 치르고, 매화동 성당의 구내 묘지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