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41 강창희 야고보

41. 강창희 야고보(1912-1945)

 

강창희(康昌熙) 야고보는 1912년 9월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일명 섶가지, 현 숙천군 검흥리) 576번지에서 강문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강문홍은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출신으로 일찍 병사하였다. 강창희 야고보의 증조부 강용기 베드로는 섶가지 공소(1898년 섶가지 본당 승격)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강창희 야고보는 어렸을 때 조부 강중승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섶가지 공소의 성숙 학교(聖肅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 뒤 강창희 야고보는 영유(永柔, 현 평원군)에 있는 사설 서당인 명륜당에서 공부하다가 일본 나고야의 동해 중학교(東海中學校)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3학년 때인 1933년에 홀어머니를 모시려고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하였다. 이듬해 순경 시험에 합격하여 중화(中和, 현 평양시 중화읍)에서 1년 동안 근무하였다.

평양지목구에서는 1936년 6월에 늘어나는 일반 업무를 조정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에 1934년부터 발행해 온 『가톨릭 연구』(『가톨릭 조선』의 전신)의 출판과 지목구의 재단 업무를 겸해 오던 김구정 이냐시오가 출판만을 담당하도록 하고, 지목구 재단 업무는 강창희 야고보에게 맡겼다. 강창희 야고보는 신덕이 깊고 성실한 데다가 책임감도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또 침착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고, 사교성도 좋아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그 뒤 강창희 야고보는 평양대목구장 오세아(William F. O’Shea, 吳 굴리엘모) 주교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 말, 일제 조선 총독부에게서 오세아 주교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을 구금되었을 때는 순천 본당(현 평안남도 순천시)의 주임으로 있던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신부와 오세아 주교 사이의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그 결과 홍용호 신부의 평양대목구장 임명과 착좌 등 평양대목구 운영의 인수인계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일제 당국이 징발한 평양의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의 반환 교섭 작업을 부감목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에게 맡겼다. 그러면서 강창희 야고보에게 김필현 신부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1945년 10월에는 평양시 북한 노동당 인민위원회와 협의하여 부지 반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사달이 났다. 평양시에서 보내온 문서를 받아 보니,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에 대한 영구 반환이 아니라 ‘일시적 대여’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강창희 야고보는 천주교회의 평신도 대표로서 인민 위원회를 방문하여 항의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하여 극도의 증오감을 낳게 하였다. 강창희 야고보의 역할과 영향력이 매우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인민 위원회를 나온 강창희 야고보는 친구인 김현준(金賢濬) 요한의 집에 들러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런 다음 귀가하던 길에 괴한으로부터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누가 그를 살해하였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강창희 야고보의 나이는 33세였다.

강창희 야고보는 신앙과 정의를 위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희생된 첫 순교자였다. 그의 시신은 신학생과 신자들이 거두어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 있는 평양대목구 묘역에 안장하였고, 홍용호 주교는 물론 교구 사제와 신자들 모두 가슴 아파하면서 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였다. 그 뒤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는 교회에 반환되었고, 1947년 9월 1일에는 정초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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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