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0 서정요 프란치스코

50. 서정요 프란치스코(1890-1950)

 

서정요(徐廷堯) 프란치스코는 1890년 1월 8일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에서 서병순의 차남으로 태어나 사흘 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으며,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동갑인 여규식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조부모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 풍수원으로 피신하여 정착한 뒤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인 ‘하느님의 종’ 서원석 요셉 수녀는 그의 장녀이고, ‘하느님의 종’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그의 장남이며, ‘하느님의 종’ 서경석 마르코는 그의 삼남이다.

결혼할 무렵에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장차 삼촌인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학생이 사제품을 받으면, 그를 따라다니며 봉사하겠다.’고 서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약속대로 그는 1911년 5월에 서병익 바오로 신부가 평안북도 의주 본당(옛 의주군 의주읍 동외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자,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아내와 함께 서병익 신부를 따라가 보좌하였다.

그 뒤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연이어 딸만 셋을 얻게 되자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아울러 첫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그 뒤로 아들 넷을 얻었고, 뒷날 그들 가운데 두 명을 사제로 봉헌하였다. 1948년에 사제품을 받은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와, 1963년에 사제품을 받은 서우석 요한 신부가 그들이다. 이에 앞서 그의 두 딸, 곧 서원석 요셉 수녀와 서의석 아퀴노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서병익 바오로 신부가 1924년에 개성 본당으로 전임되자, 서정요 프란치스코 부부도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925년에 서정요는 가족들을 데리고 신의주로 이주하여, 평안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선교를 시작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을 도왔다.

1920년대 말부터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서 평양 근교에 있는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에서 평양지목구 청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자,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가족을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이주하여 공사 현장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서포지목구 청사가 완공되는 1931년 3월까지 한결같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수도자 못지않게 기도하며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32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설립되자,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수녀회를 위한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몹시 가난하였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즐겁게 봉사하였다. 서정요 프란치스코의 겸손과 순명 정신은 주변 신자들에게 훌륭한 표양이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늘 아침 미사에 참례하였고, 가정 안에서 온 가족이 늘 함께 기도하며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또 부지런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책임감도 강하였다. 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는 “한국 사람 중에 프란치스코만큼 믿을 만한 사람은 드물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들은 서정요 프란치스코를 아버지처럼 존경하였다. 그 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입회한 둘째 딸 서의석 아퀴노 수녀가 허원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프란치스코는 선종할 때까지 그 곁에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딸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겼다.

1944년 아내 마리아를 잃은 뒤, 서정요 프란치스코는 사위의 주선으로 양조장 일을 하면서 그 사택으로 거처를 옮겨 세 아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48년 10월 10일에는 장남 서운석 보니파시오가 사제품을 받는 기쁨도 얻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듬해인 1949년 12월 7일 보니파시오 신부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피랍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때 수녀회 수녀들이 그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그는 “1950년은 성년이니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지 모르니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기다리자.”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50년의 6⋅25 전쟁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고, 열심인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점차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50년 10월 8일 밤 11시경, 양조장에 파견을 나온 정치 보위부원이 서정요 프란치스코에게 양조회사 일로 의논할 것이 있다며 보위부로 데리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서경석 마르코도 다시 찾아온 보위부원을 따라 집을 나섰는데,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또한, 수도회가 임시 해산하여 집에 머무르던 딸 서원석 요셉 수녀가 두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마찬가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10월 19일부터 평양에 입성하면서 북한군은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 노동당 보위부에서는 9월 말부터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을 처형하였고, 서정요 프란치스코처럼 양조장 인근에 살다가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간 사람들도 모두 이때 총살되었다. 서정요 프란치스코, 서경석 마르코를 비롯하여 서원석 요셉 수녀도 함께 수감되어 있다가 총살된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서정요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60세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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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