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3 김필현 루도비코

53.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1909-1950)

 

김필현(金必現) 루도비코 신부는 1909년 3월 8일 평양시 경제리(현 중구역 경상동) 279번지에서 김성호 도미니코와 기 데레사의 차남으로 태어나 5월 20일 관후리 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부친 도미니코는 관후리 성당의 후원자요 헌신적인 봉사자였다. 원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그의 여동생이다.

루도비코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한 데다가 신앙심 또한 남달랐다. 공립 종로 보통학교 시절에는 관후리 본당의 남학생들을 모아 성체 조배 반을 조직한 뒤 날마다 오후에 1시간씩 성체 조배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루도비코는 평양 고등 보통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서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로 전학하였다. 학제 개편으로 말미암아 1933년 2월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를 졸업하였다. 그런 다음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 곧 대신학교에 진학하였다가 1933년 9월 박용옥 티모테오 신학생과 함께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학 여정 기록에 보면 “하느님께 바친 몸으로 여러 어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일꾼이 되어 조국의 구령 사업에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다짐이 들어 있다.

1939년 3월 18일 루도비코 신부는 디모테오 신부와 함께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고 10월 24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1월 대신리 본당(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대신동)의 보좌로 부임하였다가 1942년 2월 그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3월 홍용호 프란치스코 신부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착좌식을 하자 부감목을 겸임하게 되었다. 1944년 4월 24일에는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성당 건물이 몰수되어 평양 계전리(옛 계동, 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있는 산정현 임시 성당에 거처해야만 하였다.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는 늘 기도하며 책임감 있게 사목하였다. 냉철하고 엄격한 성격이면서도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교리 지도에 철저하였고, 주일 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건물이 몰수되어 주일 학교 교리실이 부족하게 되자, 자신의 방을 교리실로 내주고 침대와 책상까지 사용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신학생 양성과 수도 성소 계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신학생 후원회도 조직하였다.

1945년의 광복 이후 루도비코 신부는 프란치스코 주교의 위임을 받아 평양시 인민 위원회와 협의한 끝에 1946년 3월 29일 주교좌성당 부지를 환수받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이듬해 9월부터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각 본당과 공소를 순방하면서 건축비를 모금하였으나 1948년 말부터 북한 노동당의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건축 중인 주교좌성당을 양도하라는 압력까지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루도비코 신부는 서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방문하여 창 미사를 봉헌하고 수녀들을 위로하였다.

1949년 5월 14일에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에 루도비코 신부는 최항준 마티아 비서 신부와 함께 그 행방을 알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이때부터 순교를 예견하고 각오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더위가 시작되는 유월에도 수단 속에 솜바지를 겹쳐 입고 다니며, “나는 언젠가 체포되어 갈 것을 알고 있으며, 각오하고 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1949년 6월 10일,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는 주교좌성당의 양도 문제로 평양시 인민 위원회의 소환을 받고, 마티아 신부와 관후리 성당 건립 위원회의 강유선 요셉 이사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그런 다음 정치 보위부로 강제 연행된 뒤부터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 뒤 그는 프란치스코 주교와 다른 신부들과 같이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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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