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5 석원섭 마르코

55. 석원섭 마르코 신부(1919-1950)

 

석원섭(石元燮) 마르코 신부는 1919년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자다운 기개와 호탕한 성품을 지녔고 사교성도 좋았다. 신자들은 그가 ‘사목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유머가 풍부하였고, 본당 어린이와 청년들과 서로 좋아하여 잘 어울렸으며, 그들에게 성소에 대한 관심을 많이 심어 주었다.

석원섭 마르코는 1940년에 서울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운동을 좋아하는 데다가 성격이 활발하고 도량이 넓어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신학생이었다. 모든 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947년 12월 27일 이경호 안셀모 부제와 함께 신축 중이던 관후리 주교좌성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지하의 임시 성당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 뒤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1년가량 재임하면서 성당을 건립하고자 혼신을 다하였고, 1949년 1월에는 강계 본당(현 자강도 강계시 동부동)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원섭 마르코 신부는 강계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해 4월부터 평양 기림리(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주교관에서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1949년 5월부터 프란치스코 주교와 부감목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 주교 비서 최항준 마티아 신부 등이 체포되자,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7월 초에 강계 성당으로 돌아갔다.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원섭 마르코 신부는 긴 여행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인지, 강계 성당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고열에 시달렸다. 급기야 의식마저 흐릿해져 자리에 눕게 되었고, 본당 청년과 간호사들이 교대로 그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그러던 1949년 7월 8일 밤 11시경, 갑자기 정치 보위부원들이 성당으로 들이닥쳐 석원섭 마르코 신부를 체포해 갔다. 그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을 수도 없었다.

체포될 당시 석원섭 마르코 신부의 건강 상태로 볼 때, 보통 사람들처럼 수감 생활을 견뎌 내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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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