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56 박용옥 티모테오

56.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1913-1950)

 

박용옥(朴瓏玉) 티모테오 신부는 1913년 10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흥운리(현 숙천군 장흥리) 어파 공소에서 박태호 요아킴과 김 루치아의 아들로 태어나 검산면 신지리(현 숙천군 검흥리)에서 의주 본당 서병익 바오로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33년 2월에 박용옥 티모테오는 백동(현 혜화동)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 학교 을조(乙組)를 졸업하였다. 그런 다음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 곧 대신학교에 진학하였다가 그해 9월 네 살 위였던 김필현 루도비코 신학생과 함께 함께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9년 3월 18일 김필현 신부와 함께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고 10월 24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는 1939년 11월에 신의주 본당(현 신의주시 진사동)의 보좌로 임명되어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온순하면서도 침착하였으며, 내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매사에 철저하였고, 어린이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이 연금되었을 때, 그도 신의주 경찰에 체포되어 다섯 달가량 수감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는 유치장 창살 틈으로 보이는 성당을 보면서 날마다 성체 조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얻은 동상과 허리 통증으로 말미암아 출감한 뒤에는 신의주 성모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하였다.

1942년 6월 중화 본당(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 주임으로 임명된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신자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성모 공경 신심이 뛰어나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성모 축일이면 대단한 열성으로 장엄 미사를 봉헌하였고, 토요일마다 성모 신심 미사를 즐겨 봉헌하였으며, 성모 성월을 맞이해서는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지극한 효성과 사랑을 드러냈다.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는 1943년 6월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의 비서 겸 경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가 1944년 11월 평양 대신리 본당(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대신동)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날마다 미사 전에 성체 조배를 하고, 미사가 끝난 뒤에는 15분 이상 감사 기도를 바쳤다. 그는 신자들에게 자상하고 모범적이면서도 절도 있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저녁마다 신자들과 함께 저녁 기도를 바쳤으며, 대축일이면 하루 종일 성당을 지켰으므로 신자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고해 성사를 볼 수 있었다. 박용옥 신부는 ‘예수 성심회’라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교리를 연구하도록 하였고, 신학생들이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본당 청년들과 함께 호교론에 대한 세미나를 가지도록 하였다. 또 성부(聖婦) 안나회, 소화 데레사회, 성모 성심회 등 신심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도록 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은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나 대신리 본당 신자들에게도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1948년 말부터는 북한 노동당의 교회 탄압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949년 5월 홍용호 주교와 여러 신부들이 피랍되자, 신자들은 조를 짜서 교대로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를 보호하였다.

12월 6일 마침내 정치 보위부원들이 대신리 성당에 나타났다. 그들은 판공성사를 주고 있는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에게 동행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성당으로 몰려들어 보위부원들을 막아섰다. 이에 박용옥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준 뒤 사제관으로 들어갔는데, 신자들과 보위부원들의 몸싸움이 심해지자 스스로 사제관에서 나와 보위부원들과 함께 평양시 인민 위원회로 향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관후리 본당의 서운석 보니파시오 보좌 신부를 만나 관후리 주교좌성당 양도 문제로 북한 노동당원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밤 11시경에 석방되어 서운석 신부와 함께 관후리 주교좌성당의 사제관에 도착하였다.

관후리 본당의 신자들이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와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12월 7일 새벽 3시경, 성당으로 들이닥친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두 신부가 함께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와 서운석 보니파시오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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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