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68 이재현 요셉

68. 이재현 요셉 신부(1909-1950?)

 

이재현(李在現) 요셉 신부는 1909년 7월 26일 강원도 이천의 냉골(현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에서 이영환 아우구스티노와 김 마리아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2월 3일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4대째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이재현 요셉은 어려서부터 서당 훈장인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강원도 이천의 포내 본당 부이수(P. J. Bouyssou, 孫以燮 베드로) 신부의 추천으로 1923년 9월 18일 서울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6년 6월 6일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뒤 이재현 요셉 신부는 『경향잡지』 간행과 종현(곧 명동) 성가 기숙사의 사무를 도왔고, 1937년 3월에는 소신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라틴어를 가르쳤다. 1943년에는 백동 본당(현 혜화동 본당)의 생제(P. Singer, 성재덕 베드로) 신부가 성가 소비녀회를 설립하는 데 협력하였고, 1945년의 광복 직후에는 대신학교 곧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1947년 4월 성신 대학으로 개칭)의 윤리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8년 7월 1일 이재현 요셉 신부는 소신학교 곧 성신 중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사제 양성에 힘썼다. 그 이전까지 혜화동에 위치하던 소신학교는 교실이 부족하여 이전의 용산 신학교 교사로 잠시 이전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이재현 요셉 신부는 언제나 “사제 생활은 극기의 생활이요, 보속의 생활이요, 희생의 생활이요, 십자가의 생활이요, 순교의 생활”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엄격한 수덕 생활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재현 요셉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아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항상 기도하고 쉴 사이 없이 일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는 점도 강조하였고, 미사에 참례하는 학생들에게 전례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새기도록 훈계하였다. 그는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예수 성심의 사도’로 알려져 있을 만큼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강론과 글들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이재현 요셉 신부는 날마다 성시간을 가지고, 묵상을 통하여 예수 성심의 사랑과 고통을 느끼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사재를 털어 관련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재현 요셉 신부는 직원 회의를 열고 일부 교사와 학생들을 피신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자신은 교사로 있던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와 함께 학교에 남았고, 피난길이 막혀 돌아온 학생들과 함께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옮겨 성모 동산 앞의 작은 화단에 모셨다. 그런 다음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28일 오전에 회의를 열고 모두 남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이미 수원까지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재현 요셉 신부는, “나는 떠나지 않겠소. 가고 싶어 나섰던 길도 아니오. 책임자인 나의 죽을 장소는 이곳뿐이오.”라고 하면서 다시 학교에 남았다.

이재현 요셉 신부는 공산 치하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 드릴 때 포탄이 근처에 떨어져 제대 뒤의 예수 성심 유리화가 깨졌음에도 이재현 요셉 신부는 의연하게 미사를 집전하였다. 신부의 안위를 염려한 신자들이 찾아와 피신을 권유하면, “양 떼를 버리고 어디고 가느냐.”라며 피신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7월 16일에 일어난 유엔군의 대공습 직후 인민군이 이른바 반동분자를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을 때도 꿋꿋이 학교를 지켰고, 신학교 옆 병원 용산 분원으로 수많은 부상자가 몰려들자 중환자들을 학교 교실에 수용해 주기도 하였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이 패주하기 시작한 9월 17일 이른 새벽, 보안서원들이 소신학교에 들이닥치자 소신학생 강의순은 곧바로 신부들이 거처하는 방을 돌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이재현 요셉 신부는 피신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 동성 중학교 교사 정진구 마티아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도서실에 감금되었다가 어디론가 연행되었다.

그 뒤 신학생과 신자들은 이재현 요셉 신부와 동료 신부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까지 그들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인민군에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