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0 백남창 아가피토

70.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1920-1950?)

 

백남창(白南昌) 아가피토 신부는 1920년 11월 2일 충남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가재 마을에서 수원 백씨 낙선(樂善) 요한 사도와 이 데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백낙선 요한 사도는 상홍리 본당(서산 동문동 본당의 전신)의 회장이요, 1950년 한국 전쟁 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1935년 3월 서울의 소신학교 곧 동성 상업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한 백남창 아가피토는 재학 시절에 언제나 명랑하고 겸손하였으며, 성적도 늘 상위권에 들었고, 신심 생활도 열심이어서 모든 학우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소신학교 4학년 때 각기병에 걸려 3-4년 동안 고생하였지만, 인내와 극기의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여 중도에 휴학하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이때 앓은 병의 후유증 때문에 시신경이 위축되어 늘 고생을 하였고, 이 때문에 외국 유학의 기회도 포기하였다고 한다.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백남창 아가피토는 용산의 대신학교 곧 예수 성심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일제 당국이 대신학교를 강제로 폐쇄하여 그는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여 공부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해방 뒤 1946년 5월에 월남하여 9월부터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1946년 11월 21일 명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는 충청남도 당진의 합덕 본당의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10월 말에는 서울 용산에 있는 소신학교 곧 성신 중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라틴어 과목을 가르쳤다. 그러던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6월 28일에는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였다. 이때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는 교장인 이재현 요셉 신부와 함께 “학교를 두고 피신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남았다.

7월 16일 유엔군의 용산 공습 직후에 인민군은 용산 지역에서 이른바 반동분자를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는 이재현 요셉 교장 신부와, 용산 소신학교로 피신해 온 동성 중학교의 정진구 마티아 신부 등과 함께 꿋꿋이 학교를 지켰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이 패주하기 시작한 9월 17일 이른 새벽, 보안서원들이 소신학교에 들이닥치자 소신학생 강의순은 곧바로 신부들의 방을 돌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는 피신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재현 요셉 교장 신부, 동성 중학교의 정진구 마티아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도서실에 감금되었다가 어디론가 연행되었다.

그 뒤 신학생과 신자들은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와 동료 신부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까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도 인민군에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