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5 강유선 요셉

75. 강유선 요셉(1901-1950?)

 

강유선(姜有善) 요셉은 1901년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태일리(현 대동군 마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총명한 데다가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배움에 있어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고향의 마산 본당에서 세례받은 뒤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으며, 교리에도 해박하고 언변도 좋았다. 체구는 작았지만, 활달한 성격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담대함도 지니고 있었다.

강유선 요셉의 누님은 마산 성당에서 식복사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강유선 요셉도 자연스럽게 마산 성당의 잡무를 도와주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의사소통과 일상적인 업무 해결, 교리 교육을 보좌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그는 순안, 서포, 순천, 숙천 그리고 영유 등지를 순회하면서 신앙의 불모지인 평안도 지역에서 전교 회장의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하였다.

1932년 평양 관후리 본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가톨릭 소년군, 곧 지금의 보이 스카우트를 창단하자 강유선 요셉 회장은 최삼준 프란치스코 단장과 함께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양대목구의 가톨릭 운동에도 참여하여 가톨릭 문화 계몽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6년 서포 본당(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의 전교 회장으로 활동하던 강유선 요셉은 남산리 공소로 파견되어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냉담자 회두와 예비 신자의 입교 운동에 힘썼으며, 그 결과 공소가 다시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말에는 징용을 피하려고 순천 농민회의 서기로 일한 적도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된 뒤에 평양대목구에서는 평양시 인민 위원회와 협의한 끝에 1946년 3월 일제 당국에 징발되었던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를 환수받고, 이듬해 9월부터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때 강유선 요셉 회장은 성당 건립 위원회 상임 이사를 맡아 부감목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본당과 공소 등을 다니며 건축 기금을 모금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1946년에 노동당원들이 평양 성모 보통학교에 와서 십자가를 부수려 하자, 십자가를 감싸며 “나를 죽인 후에 부수라.” 하고 완강하게 버텨 십자가를 지켜 낸 일도 있었다.

1948년 말부터는 북한 공산 정권의 본격적인 교회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평양시 인민 위원회에서는 건축 중인 주교좌성당을 양도하라고 교회 측에 압력을 가하였고, 강유선 요셉 회장은 주교 비서 최항준 마티아 신부와 청년회 신자들과 함께 부감목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를 도와 성당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듬해 초까지 성당 부지의 양도 문제에 대해 평양시 인민 위원회와 끊임없이 논쟁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10일,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와 최항준 마티아 신부와 함께 인민 위원회에 갔다가 체포되었고, 정치 보위부로 강제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 뒤 강유선 요셉 회장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평양 인민 교화소의 특별 정치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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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