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6 최삼준 프란치스코

76. 최삼준 프란치스코(1907-1950?)

 

최삼준(崔三俊) 프란치스코는 1907년 경북 대구시 남산동에서 최경집(崔景集) 빈첸시오와 이봉조(李奉祚)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안에서는 흔히 ‘자백’(慈伯)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의 세례명 프란치스코에서 연유된 이름이었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를 잃고 신심이 깊은 어머니 슬하에서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최삼준 프란치스코는 서울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동경 상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과 2년을 수료한 뒤 귀국하였다. 그런 다음 평양 성모 보통학교에 교사로 임명되어 평양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신앙심이 깊고 교회 일에 적극적이던 변 안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얻었는데, 아들 형제도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복사를 하였다.

1932년에 최삼준 프란치스코는 관후리 본당(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가톨릭 소년군, 곧 지금의 가톨릭 스카우트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의 신심 함양과 단체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또 성극단과 합주단을 조직하여 본당과 공소를 순회하였고,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가톨릭 문화의 소개는 물론 전교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최삼준 프란치스코는 성품이 유순하고 신앙심이 깊었고, 포용력도 있었으며, 가톨릭 신자로서나 지도자로서도 손색없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 뒤 교사직을 그만둔 최삼준 프란치스코는 직조 공장을 경영하다가 중단하고 평북 강계(현 자강도 강계시)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성당에 나가 봉사하였고, 본당 신부의 사목 활동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1945년의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북한의 공산화 과정으로 말미암아 교회 활동은 하루가 다르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산 정권의 박해로 남하하는 신자들이 점차 늘어나자 본당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최삼준 프란치스코의 신앙심과 열성은 본당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지만, 북한 공산 정권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5월부터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비롯하여 몇몇 신부들이 피랍되거나 행방불명되자, 평양 기림리(현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주교관에서 요양하던 강계 본당의 주임 석원섭 마르코 신부는 7월 초 성당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강계로 귀환하였다. 이에 최삼준 프란치스코는 석원섭 마르코 신부에게 병문안을 갔다가, 귀가하던 길에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피랍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병석에 있던 석원섭 마르코 신부도 1949년 7월 8일 밤 11시가 조금 지나서 보위부원들에게 피랍되었다.

한편 최삼준 프란치스코의 부인 변 안나는 남편의 귀가를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평양으로 가서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집을 나섰다가 강계역 대합실에서 선종하고 말았다. 그때가 1949년 8월이었다. 그 뒤 최삼준 프란치스코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공산 정권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투옥되었다가 1950년 10월 18일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직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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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