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7 김정희 안드레아

77. 김정희 안드레아(1895-1950?)

 

김정희(金貞熙) 안드레아는 1895년 2월 10일 서울 공덕리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상집(金商集) 요셉과 김순녀(金順女) 바울라의 5남매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전 춘천교구장 장익 요한 주교의 외삼촌이다.

김정희 안드레아는 장성한 뒤 사제의 길에 뜻을 두고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15년경에 신학교를 중퇴하였다. 1916년 김수선(金壽仙) 수산나와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어 나중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입양하였다. 그는 낙원동에서 미곡상을 하며 생활하였고, 1930년대부터는 혜화동 본당의 회장, 한국 천주교 가톨릭 청년회의 고문 등으로 교회에 봉사하며 살았다. 1947년에는 ‘종현 가톨릭 출판사’의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한편 김정희 안드레아 회장은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건축 일을 배웠다. 그럼에도 본디 재주가 많았으므로 얼마 안 되어 새로 배운 건축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김정희 안드레아는 교회의 건축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려고 하였고, 명동 본당의 정남규 요한 회장이 사재를 털어 군자동에 양로원을 지을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1939년에 완공된 계성 초등학교의 강당과 1940년에 건립된 동성 고등학교의 강당 공사에도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명동 대성당 건축 50주년을 앞두고 실시된 대보수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김정희 안드레아 회장은 혜화동(현 동성 중학교 남면)에 있던 교회 소유의 포도밭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피하여 많은 성직자와 신자가 남쪽으로 피신할 때에도 ‘자신은 지은 죄가 없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서울에 남았다.

6월 28일 새벽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천주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는 물론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한 뒤에도 한동안 그들의 손길은 김정희 안드레아 회장에게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혜화동에 살던 주민 하나가 김정희 안드레아의 신분과 교회 활동에 관한 내용을 동숭동 인민 위원회에 고발하였다. 9월 16일 인민 위원회 위원장과 내무서원이 혜화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김정희 안드레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성호를 긋고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뒤 김정희 안드레아 회장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다른 종교 지도층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북송되거나 반동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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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