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78 김한수 라우렌시오

김한수(金翰洙) 라우렌시오는 1886년 12월 7일(음력 11월 12일) 충남 공주 신흥리에서 김영학과 이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혼인하였으나 일찍이 첫 부인을 잃었고, 스무 살에 박금년 수산나와 재혼하여 10남매를 두었다.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한성 법어 학교(法語學校)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3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우고 열 아홉 살 때 졸업하였다.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스물한 살 때인 1907년 3월 30일이었다.

그 뒤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다른 직장을 마다하고 오로지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 뮈텔(G. Mutel, 민덕효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비서 겸 경향잡지사 총무로 활동하면서 교회 재산을 관리하였고, 『경향잡지』에 관한 일과 성물 판매 등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김한수 라우렌시오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살아 있는 교회의 백과사전’이라고도 하였다.

이 밖에도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1907년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라리보(H. Larribeau, 원형근 하드리아노) 신부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927년에는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의 청년회 간사가 되어 청년회 활동을 이끌었다. 뮈텔 주교가 사망한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후임 주교들을 보필하면서 경향잡지사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종현 가톨릭 출판사’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거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두 아들이 김한수 라우렌시오에게 함께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혼자 서울에 남았다.

 

“내 걱정은 말아라. 나와 함께 자라 온 ‘잡지사’를 버리고 나는 떠날 수 없다. …… 지금 주교 댁은 텅 비어 있지 않니? 그놈들이 성당이나, 이 주교 댁 건물을 어떻게 나쁘게 써먹지나 않는지 지켜보아야겠다. …… 놈들이 나를 거기서 몰아냈어도, 나는 먼발치로나마 뾰족하게 솟아 있는 저 (명동 대성당) 종탑을 바라보며 목숨을 같이 하겠다.”

 

한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7월 중순에 명동 성당 구내의 모든 건물을 비우라고 명령하였다.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이때 경향잡지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피난을 떠난 사위 김인배(金仁培) 바오로의 빈집(서울 중구 산림동)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1950년 9월 16일 새벽, 정치 보위부원들이 김인배 바오로를 체포하러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김인배 바오로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김 바오로 대신 김한수 라우렌시오를 체포하여 끌고 갔다. 그날 밤에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묵주 신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9⋅28 서울 수복 뒤 피난에서 돌아온 가족들은 김한수 라우렌시오의 행방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김한수 라우렌시오는 다른 종교 지도층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북송되었거나 반동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뒷날 장면 요한 총리는 김한수 라우렌시오의 행적을 회고하면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한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귀중한 분”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