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현장조사(2019. 5.17.)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진묘 터(인천 반주골)
▲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진묘 터 |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1756~1801): 본관은 평창,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서울 반석방의 약현(현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1868년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와 이재의 토마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다. 집안 전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고, 장성한 뒤에는 정약종과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했다. 25세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35세인 1790년 의금부 도사를, 이듬해 1791년에는 평택 현감을 지냈다.
천주 신앙을 접하기 전부터 서양 서적을 읽었고, 특히 서양 수학에 관심을 가졌다. 1783년 말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친구 이벽의 부탁을 받고 북당 선교사들을 찾아가 만났다. 이듬해인 1784년 초 예수회 그랑몽 신부에게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여 조선의 첫 신자가 되었다.
귀국한 뒤 이벽과 만나 가까운 동료들과 세례식을 갖기로 하고, 그해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 처남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첫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1785년 봄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동료들과 신앙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787년에는 성균관 앞 반촌에서 정약용 등과 교회 서적을 연구하다 발각되기도 하면서, 점차 집안 안팎의 비난과 박해가 거세졌다. 1791년 진산사건(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순교)으로 이 베드로도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에 앞서 1786년에는 동료들과 가성직 제도를 만들어 신부를 활동하다 잘못을 깨닫고 중단하기도 했고, 윤유일 바오로를 밀사로 북경 교회에 파견하기도 했으며,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795년 주문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윤유일 바오로 등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베드로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못되어 예산으로 유배되기고 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 베드로의 집안의 박해가 극심해졌고, 한때 교회를 멀리한 적도 있다. 이를 두고 황사영 알렉시오는 <백서>에서 "이승훈은 여러 차례 천주교를 헐뜯는 글을 썼으나 모두 본심에서 한 일이 아니었다."며, "이승훈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신앙을 위해 죽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3월 23일 체포되었고, 의금부에서 여섯 차례의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 형관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진술을 하거나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시킨 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인천 반주골(현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산 132-1)에 안장되었고, 1981년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한편 집안 전승에 따르면 이승훈 베드로는 형장으로 끌려갈 때 아래의 유언을 남겼다고 전하는데, 일제시대인 1930년 피숑 신부가 이를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수확할 때가 왔다. 잘 깨어 있어야 할 때다."
▲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진묘 터 앞에서(2019. 5. 17.) |
月落在天 水上池盡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대로 있고,
물은 아무리 치솟아도 못 속에 그대로 있다)
* 위의 한문시는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유시로, 이에 대한 신빙성 여부와 내용 해석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 유시는 주재용 신부가 1970년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에서 처음으로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