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李承薰) 베드로는 본관이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으로, 서울 반석방(盤石坊)의 약현(藥峴, 현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1868년에 순교한 이신규(李身逵, 마티아)와 이재의(李在誼, 토마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는 데 노력하였고, 장성한 뒤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사도)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25세 때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790년에 의금부 도사로, 이듬해에 평택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베드로는 천주 신앙에 대해 알기 전부터 집안에 있던 서양 서적을 읽어 왔고, 그 과정에서 특히 서양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3년 말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그는 자신의 생각과 친구 이벽(요한 세례자)의 부탁에 따라 북당(北堂)으로 서양 선교사를 방문했으며, 이듬해 초에는 예수회의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요한)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뒤에 귀국하였다. 조선의 첫 번째 신자가 된 것이다.
귀국한 뒤 이벽과 만난 베드로는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세례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처남 정약용, 이벽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때부터 온갖 비난과 박해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1785년 봄에는 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있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갖던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787년에는 성균관 앞의 반촌(泮村)에서 처남 정약용 등과 함께 교회 서적을 연구하다가 발각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1791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관직을 잃고 말았다. 또 다음해 초에는 평택현감으로 부임할 때 향교의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에 앞서 베드로는 1786년에 동료들과 함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고 약 1년 동안 신부로 활동하다가 잘못을 깨닫고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또 윤유일(바오로)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 교회로 파견하기도 했고, 이후 선교사 영입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고 윤유일 등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베드로는 천주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야 해배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훈 베드로는 신심이 약해지기도 하였고, 교회를 멀리한 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훗날 “이승훈은 1791년 이후 신앙에 전심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마찬가지로 주문모 신부도 자신이 조선에 입국할 무렵에는 “이미 이승훈이 교회로부터 이탈한 상태[叛敎]였다.”고 하였다. 반면에 황사영(알렉시오)은 “이승훈은 여러 차례 천주교를 헐뜯는 글을 썼지만 모두 본심에서 한 일은 아니었다.”라고 기록하거나 “이승훈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3월 23일(음력 2월 10일)에 체포되었다. 그런 다음 의금부로 압송되어 31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순교의 용덕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진술을 하거나 신자들을 밀고하지는 않았으며, 끝내는 천주교로 인해 사형 판결을 받고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