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교구 현장조사(2019.5.16)]
양주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묘소(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35-1반지)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이며, '시복'(時福)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1790년 15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조카인 정명련(일명 난주) 마리아와 혼인하면서 천주교를 접하였고, 처삼촌들과 처고모부인 이승훈 베드로 등에게서 천주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많은 친척과 교우들이 교회를 멀리했으나 그는 천주 신앙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고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179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받았고,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 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 신앙 전파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고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황 알렉시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했다. 이후 배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교회를 재건할 방책을 생각하며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집필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으나 박해자들은 <백서>를 흉서로 보았고, 황 알렉시오를 반역자로 지목하여 결국 1801년 12월 10일 대역부도(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를 크게 어긋남)의 판결을 내렸다. 황 알렉시오는 26세의 나이에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했다.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
- 황사영 알렉시오-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묘소 앞에서(2019. 5.16) |
파주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 묘소(파주 광탄하늘정원 묘지 내)
▲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의 묘비 |
-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1818~1878): 1866년에 순교한 정의배 마르코 회장의 두번째 부인. 혼인한 뒤 서울 창동에 살다가 남대문 밖 자암으로 이주해 살았다.
총명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피 가타리나는 어려서 어머니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으나 비신자들과 함께 살았기에 올바로 교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 1837년 무렵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온 정 마르코와 혼인하였고, 이후 입교한 남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자 피 가타니나도 신자로서의 본분을 되찾고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앙을 실천했다.
부부는 정덕을 지키기로 굳게 언약했고, 대소재를 열심히 지키고 묵상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으며,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를 권면했다. 1859년 말 박해가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베르뇌 주교를 보호하는 데 헌신했고, 다블뤼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한동안 자신의 집에 모시는 등 남편인 마르코 회장을 도와 교회에 봉사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선교사들과 남편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뒤 더욱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며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10여년 뒤인 1877년 리델 주교가 재입국하자 리델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았고, 1878년 1월 28일 리델 주교가 체포될 무렵 가타리나도 체포되었다.
좌포도청에서 모진 문초와 형벌 가운데 가타리나는 선교사들의 거처를 진술하지 않아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몸은 상처투성이었으나 옥중에서도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였고, 1878년 3월 17일 장티푸스까지 걸려 옥사했으며, 당시 그녀의 나이 60세였다.
▲ 하느님의 종 피 가타리나 묘비 |
▲ 피 가타니라 묘비 앞에서(2019. 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