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본관은 창원이요, 자는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이었다. ‘시복’(時福)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황석범(黃錫範)과 이윤혜(李允惠)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난 그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요절한 탓에 어머니와 증조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알렉시오는 15세 때인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그는 같은 해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큰 딸 정명련(丁命連, 일명 난주[蘭珠])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이것은 그가 천주교를 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니, 같은 해에 그는 처삼촌들과 처고모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알렉시오는 과거를 포기하고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밤낮으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교회를 멀리했지만, 그는 “천주 신앙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794년 말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널리 교류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거나 교우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집을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또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자주 모셔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신부를 도와 교회에 봉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황사영 알렉시오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3월 23일(음력 2월 10일)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체포령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피신 계획을 세워 자신의 성을 이(李)로 바꾸고 상복으로 변장하였다. 그런 다음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와 함께 제천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 김귀동(金貴同)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하였다.
이후 알렉시오는 3월 그믐(음력)에 김한빈 베드로를 서울로 보내 교회 소식을 알아오도록 하였고, 베드로는 배론으로 돌아와 지도층 신자들의 순교,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자수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알렉시오는 이때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책을 생각하면서 북경 주교에게 보낼 <백서>(帛書)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3일(음력 8월 26일)에는 황심(黃沁) 토마스가 배론으로 찾아와 야고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했으며, 알렉시오는 그에게 <백서> 초안을 보여주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방법을 의논하였다.
알렉시오가 <백서>를 완성한 것은 10월 29일(음력 9월 22일)이었다. 이 <백서>는 황 토마스를 통해 옥천희(玉千禧) 요한에게 전달되고 이후 요한이 북경에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북경에서 돌아오던 6월에 의주에서 체포되었으며, 10월 22일(음력 9월 15일)에는 토마스마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알렉시오는 토마스의 실토로 11월 5일(음력 9월 29일) 김한빈 베드로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백서>도 박해자들에게 압수되었다.
의금부로 압송된 황사영 알렉시오는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부터 신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고,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백서>를 흉서로, 알렉시오를 반역자로 지목하고 그 안에 담긴 교회 재건 방책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그 결과 알렉시오는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에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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