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배론

원주교구 현장조사(2019. 5. 14)

황사영 알렉시오

 

배론성지 내 황사영 토굴



▲ 황사영 토굴과 토굴 내 전시된 <백서> 사본

 

배론성지는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작성하고 체포된 곳이다.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 (황사영 알렉시오)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이며, '시복'(時福)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1790년 15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조카인 정명련(일명 난주) 마리아와 혼인하면서 천주교를 접하였고, 처삼촌들과 처고모부인 이승훈 베드로 등에게서 천주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많은 친척과 교우들이 교회를 멀리했으나 그는 천주 신앙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고 더욱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179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받았고,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 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 신앙 전파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고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황 알렉시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했다. 이후 배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교회를 재건할 방책을 생각하며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집필했다.

황 알렉시오가 <백서>를 완성한 것은 1801년 10월 29일이다. 이 <백서>를 황심 토마스를 통해 옥천희 요한에게 전달된 뒤 북경 교회에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옥 요한은 6월 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황 토마스마저 10월 22일에 체포된 뒤였다. 황 알렉시오도 11월 5일 배론에서 체포되면서 <백서>도 압수되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백서>를 흉서로 보았고, 황 알렉시오를 반역자로 지목하여 결국 1801년 12월 10일 대역부도의 판결, 곧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를 크게 어긋났다는 판결을 내렸다. 황 알렉시오는 26세의 나이에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했다.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

 

 



▲ 황사영 토굴 앞에서(2019. 5. 14.)

 



▲ <백서>(帛書)

* <백서(帛書)>:

신유박해가 한창이던 1801년 10월 29일 황사영 알렉시오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으로 이 <백서>를 작성했다.  '백서'(帛書)는 비단(帛)에 씌어진 글(書)을 뜻한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깨알같은 작은 붓글씨로 씌여 있고, 총 12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마다 글자수는 96~124자이다. 주요 내용은 1791년 신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과정과 순교자들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고,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황 알렉시오가 체포될 당시 함께 압수된 <백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문서 파기를 위한 문서 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어 뮈텔 주교가 입수한 뒤 1925년 순교 복자 79위 시복 때 로마로 보내졌으며,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보내기에 앞서 실물 크기대로 동판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 <백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