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포천 (이벽 요한 세례자 생가터와 진묘터)

춘천교구 현장조사(2019. 5.15.)

 

포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생가 터



▲ 포천시 화동로 477번길 39번지 일대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의 생가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1754~1785):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 1754년 포천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광주 마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며 학문을 쌓았다.  1770년 중반 무렵 스승 권철신과 동료들이 천주교 서적을 접하던 시기에 이미 그도 천주교 서적을 읽었던 것 같다. 이벽은 서울의 저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수표교 인근으로 이주했고, 1783년 말 동료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 선교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서적을 얻어 오도록 부탁했다.

 1784년 3월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그가 가져온 새로운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 천주 교리가 진리임을 더욱 깊이 확신하면서 이승훈 베드로와 의논하여 세례식을 갖기로 합의했다.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의 그의 집에 권일신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이 모인 가운데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식을 베풀었으니, 이것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다. 이후 이 요한 세례자는 동료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교리를 전하고 신앙 모임을 가졌고, 이후에는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으로 옮겨 집회를 가졌다.

1785년 을사년 형조의 금리들(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이 명례방 앞을 지나다 도박꾼들의 모임인 줄로 여겨 수색하였고, 그곳에 모인 신자들을 체포하고 성물과 교회서적 등을 압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중인이었던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는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고, 양반인 이 요한 세례자와 이 베드로는 가족의 박해를 받아야 했다. 특히 이 요한 세례자의 부친 이부만은 그를 고향 집으로 불러와 집 안에 가두고 갖가지 방법으로 천주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이후 계속된 가정 박해로 이 요한 세례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 이 요한 세례자의 시신은 고향 포천 화현리에 안장되었고, 1979년 4월 묘지 발굴로 지석이 확인되었으며, 같은해 6월 21일 혜화동 성당과 명동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천진암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진묘 터

 



▲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의 진묘 터

 

 

 

 

 

 


▲ 이벽 요한 세례자 진묘 터 앞에서(2019.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