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벽 요한 세례자 (1754~1785)
이벽(李蘗) 요한 세례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으로, 1754년 포천 화현리(현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무반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이벽은 학문에 더 뜻을 두었고,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뒤에는 정약전·약용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닦았다. 이에 앞서 그는 안동 권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사별하고, 해주 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벽이 언제, 어떠한 경로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스승 권철신과 동료들이 천주교 서적을 접하던 1770년대 중반 무렵에는 그도 이미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점차 천주 교리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1779년 겨울에는 스승과 동료들과 함께 천주 교리에 대해 토론한 적도 있었다.
그에 앞서 이벽은 고향을 떠나 서울의 저동(현 서울시 중구 저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수표교(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인근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리고 1783년 말에는 동료 이승훈이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올 것을 부탁하였다.
1784년 3월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요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이벽은 그가 가져온 새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 천주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그뒤로는 스승과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교리를 설명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런 다음 베드로와 의논하여 그가 북경에서 가졌던 세례식을 서울에서 갖기로 합의하였다.
1784년 겨울, 베드로를 비롯하여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과 정약전·약용 형제가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북경에서 배운 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니, 이것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이때 받은 이벽의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권일신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의 세례명은 요한 사도였다.
이후 이벽 요한 세례자는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는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김범우 토마스 등이 세례를 받았고, 충청도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와 전라도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경기도의 권철신 암브로시오도 세례를 받았다. 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이루어지던 신앙 공동체 모임이 명례방(明禮坊) 김범우 토마스의 집으로 이전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785년 봄의 어느 날 명례방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주도 아래 신자들이 모여 집회를 갖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형조의 금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집회를 도박꾼들의 모임으로 여겨 수색하게 되었고,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조로 압송하였다. 동시에 그곳에 있던 교회 서적과 성물도 모두 압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는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었고, 이벽 요한 세례자와 이승훈 베드로는 가족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해야만 하였다. 특히 요한 세례자의 부친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집안에 가두고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고, 이후 계속된 가정 박해로 요한 세례자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