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마원 성지

마원 성지

복자 박상근 마티아 묘 소재지

 

마원 성지   (*사진 출처: 마원성지 홈페이지)

 

마원성지

마원은 조선 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었던 터라 ‘마포원’ 또는 ‘마판’이라고도 불렸고,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충청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모여 들면서 교우촌을 이루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의 폭풍이 문경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까지 들이 닥쳤고, 이때 마원 교우촌의 교우 40여 명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뒤 순교하였다.

특별히 마원성지에는 순교 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복자 박상근 마티아 묘소  (*사진 출처: 안동교구 홈페이지)

 

복자 박상근 마티아와 칼레 강 신부

복자 박상근 마티아 초상화  (*출처: 마원성지 홈페이지)

문경 읍에서 아전을 지낸 박상근 마티아는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15일 좁쌀을 사기 위해 처남과 함께 한실 교우촌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경상도 교우촌들을 순방하던 도중 병인박해 소식을 듣고 은거하고 있던 칼레 강 신부(A.N. Calais, 1833-1884)를 만났다. 칼레 신부는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박 마티아를 따라 문경읍으로 갔다. 하지만 문경읍에서 신분 노출의 위험을 겪으면서 다시 한실 교우촌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민가를 피해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가는 도중  배고픔과 목마름 등으로 갖가지 고생을 겪고 피곤에 지치자, 박 마티아가 함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인근 마을로 보내고 혼자 한실 교우촌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 내용 출처: 칼레 신부가 상해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8년 2월 13일 편지파리외방전교회 문서 Vol. 579, ff.1270-1292 )]

 

칼레 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시절 사진  (*사진 출처: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홈페이지)

 

이때 두 사람이 헤어지는 순간에 대해  칼레 신부는  이렇게 전했다.

"우리가 문경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문경읍의 포졸들이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는 말들이 많았고, 그들이 저를 붙잡으로 왔을 때는 이미 제가 떠난 뒤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마티아와 저는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거라고는 마른 과일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 저희는 땅에서 막 싹이 움트기 시작한 야생초 몇 뿌리를 캐내 갈증을 풀었으며, 저는 마티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20리만 더 가면 한실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닿을 테이고, 어느 산봉우리에서도 그 산을 알아 볼 수 있을 터이니, 나는 이 길을 거뜬히 갈 거요. 자네는 너무 지쳤으니 자네가 알고 있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 끼니를 들어요." 그러자 이 인정많은 교우는 제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이신 이 산에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행여 한실에 아무도 없으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터인데. [...]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이상이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자기 희생의 다툼 중 이 헌신적인 교우가 했던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제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밤까지 저를 따르기는 불가능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심 저는 더는 물러서선 안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저를 너무도 감동시킨 이 사람에게 명령이라는 방법을 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할 것을 명하겠네. 자네가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을 챙기고 나머지 절반을 내게 주게. 그리고 자네 신부인 내 말을 따르게.' 이 말에 그는 저를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저는 혼자 떠났습니다.

그가 멀리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울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눈을 제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산 하나가 나오면서 제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고, 저는 하느님께 저를 맡기고 줄곧 걸었습니다. 저는 길을 따라 걷지 않고 가장 짧게 질러가는 쪽을 택해 걸으며, 한실의 산들을 시야에서 놓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칼레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일부)

 

박상근 마티아는 칼레 신부와 헤어져 문경읍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가족들이 그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했다.

이후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1985년 9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하였다.

 (*일부 소개글 출처: 마원성지 홈페이지)

 

복자 박상근 마티아와 칼레 신부 동상 예수님과 함께 (*사진 출처: 안동교구 홈페이지)

 

* 관련 기사 (문경 한실 교우촌에서 마원성지까지) (링크)